객관화의 탈을 쓴 합리화
어릴 때의 기억은 흐릿해져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만 기억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부모님과 어릴 때 얘기를 나누다 보면 늘 "만날 너 유리한대로만 기억하더라?"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 유리한대로만 기억하는 어린 날을 생각해 보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서도 곧 잘했다. 9년을 외동딸로 살았으니, 9년 동안은 아마도 보살핌을 잘 받으며 자랐을 테지만, 영영 나 혼자만 누릴 줄 알았던 그 보살핌은 내 인생에서 9년이 전부였다. 이 후로는 그 작은 손으로 갓 태어난 동생을 케어해야 했기 때문에 그 후로 나는 혼자서도 잘하는 대한민국의 첫째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깨우기 전에 일어나서 혼자 등교 준비를 했고, 엄마는 한 번도 내게 준비물이 무엇인지 숙제는 했는지 묻지 않았다. 혼자 머리를 감고, 학교에 가고, 갑자기 예상치 못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집에 돌아왔다. 어쩌면 그때부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기도.
그래서인지 나는 책임감이 강한 편이다.
일을 할 때도 하고 싶지 않은 일,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일이어도 소위 까라면 깠다. 맡은 일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완료해내야 했고, 계약기간이 정해진 일은 내게 맞지 않는 일이라도 계약 기간 까지는 꾸역꾸역 해내야 했다. 어떻게 보면 그게 나에겐 책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한다는 책임감.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없다는 책임감.
어쩌면 그래서 잘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자꾸 왜?를 물었어야 했는데, 그냥 하라는 대로 했다. 저 사람의 기대치만 맞추면 된다는 그런 안일함. 그 이상은 고민하지 않은 무지. 생각해 보니 그런 나에게 성장이라는 단어는 사치였을지도 모르겠다. 늘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그 사람의 기대치만 맞추려 일해왔으니, 내게 스스로 기념할 만한, 누군가에게 기념받을 만한 성장이라는 게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작년에 한참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문득 '근데 왜 사람이 꼭 성장해야 하지? 왜 성장하면서 일을 해야 하지? 그냥 하면 안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꾸준히 하는 사람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상처받으며 성장해야 하는 걸까? 그냥 일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어차피 내가 선택한 직업은 부귀영화를 누릴 만큼 급여가 높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성장하며 일하는 것은 필요하다. 비록 그 성장이 뛰어난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일을 하기 위한 동기부여로 성장은 필요한 요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 걸까? 어떻게 일하고 싶지?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어떻게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지? 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김민철 작가님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책에서 무릎을 탁 친 부분이 있는데, 팀원은 팀 안에서 안전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팀원이 팀에서 안전하지 못하면 쉽게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는 것. 그 아이디어를 내는 순간 내 일이 될 테니까.라는 설명을 봤다. 지금까지 내가 몸담아온 조직은 그런 조직이었다. 수직적인 관계, 회의시간에 아무도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는 분위기, 모두들 하라면 해야지, 하는 마음들로 모인 사람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뱉으면 그 일은 내 일이 되는 마법의 조직. 어쩌면 내 문제도 있겠지만, 좋은 팀을 만나지 못했던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객관화 같은 합리화를 해본다.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마음보다는, 내게 좋은 팀이란 어떤 팀인지, 나는 어떤 팀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어떤 팀원과 일하고 싶은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물음표에서 그치지 말고 나만의 답을 찾아내는 행동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직은 스스로 질문을 찾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곧 답을 찾는 실행도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