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에 가까운 것일지도.
가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면 이내 왜인지 모르게 우울해지는데, 정확한 이유를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 아무래도 나는 내 감정을 파고들지 못했던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럴 땐 몸을 움직인다. 청소를 하고, 괜히 서랍을 정리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감정은 휘발되고 기분만 남는다. 늘 같은 순간엔 같은 방법을 사용하다 보니, 나는 내 감정이 어떤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자주 인센스 향을 피운다. 처음에는 집안의 냄새를 잡아내기 위함이었는데, 어느샌가 그 향에 취한 나를 발견한다. 다양한 스틱을 준비해 두고 기분에 따라 끌리는 인센스 스틱을 태운다. 향을 맡으며 어떤 생각을 하곤 하는데, 정확히 어떤 생각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타버린 재와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향이 뭐냐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보리차를 끓이고 식혀서 마셨었다. 이제는 그조차 귀찮게 여겨져 그냥 통에 냉수를 붓고 티백을 오래 담가놓는다. 끓여서 식힐 때랑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편리함을 쉽게 포기하기 어렵다. 그러니 나는 편리함이 우선인 사람인 걸까?
자주 가던 카페의 사장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이다. 화를 내지 않으려 그 말을 되뇌는 날들이 많아졌다. 배우자가 사용한 수건을 겹쳐서 널어놓아 냄새나는 수건을 보고 짜증이 치밀었다. 온갖 욕을 속으로 하다가 문득,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문제 삼지 않았다. 가정이 평화로워졌다. 결국 우리 관계에서 중요한 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지하철 노약좌석 앞에 서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보조기구를 가지고 타셨다. 입구 앞에 보조기구를 두시곤 바로 옆 노약좌석 끝에 앉아서 책을 보시던 할아버지에게 "옆으로 좀 가세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해하셨다. 어리둥절해하는 할아버지에게 그 할머니는 "이거 놓아야 되니까 옆으로 좀 가라고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계속 어리둥절해하면서 읽던 책을 보셨다. 그 할머니가 뭐라 뭐라 하시는데, 주변 노약좌석에 앉으신 분들이 더 난리였다. 그러다 반대편 할아버지가 일어나선 그 할머니에게 이쪽으로 오시라고 했다. 그 모습을 보시더니 책을 읽던 할아버지가 옆으로 자리를 옮겨주셨다. 원래 할아버지의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읽는 책을 보더니 "거, 일본 놈들 책을 왜 봐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어리둥절해하며 "일본책을 읽느라 그 자리에 앉았던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일본 놈들이 우리한테 한 짓이 어떤 짓인데 그런 나쁜 놈들 책을 봐요. 보시마요."라고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기가 찼다. 일본과의 역사를 싫어하시는 마음은 천만번 동감하고 나 또한 그런 일본을 미워하느라 군인이 되길 꿈꿨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기가 찼던 것은 할머니의 태도였다. 왜인지 짜증과 화가 많은 나의 나이 든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진 않았다. 아무래도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되지 않음'을 더 되뇌어야 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