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정했던 멘토의 한 마디
오랜만에 김연수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있다.
김연수 작가님을 좋아하게 된 건, 사춘기 시절 스스로 멘토로 삼았던 분 때문이었다. 그분이 내게 김연수 작가님의 청춘의 문장들을 선물해 주시며, 내 청춘의 문장이 무엇일지 궁금하다고 하셨을 때부터 나는 속절없이 김연수 작가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가 이해하기엔 작가님의 문장들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책을 사모았다.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문장들이 담긴 이야기는 원더보이였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에 나왔던 책이었다. 제대로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작가님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성인이 되고 난 후 문득 책장에서 청춘의 문장들을 다시 발견했다. 더 이상 내게 그분은 삶의 멘토가 아니며, 연락도 끊긴 지 오래였지만 왜인지 그 책을 다시 읽을 때가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까.
거의 책을 펼침과 동시에 마음에 들어온 문장이었다. 속절없이 나는 다시 김연수 작가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한 문장으로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가 속절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을 쓰고 싶었다. 사실 내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그 멘토로 삼았던 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분은 많이 읽고, 자주 쓰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나도 자주 읽고,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울과 비관이 기본 감정인 나의 사춘기는 기복이 심했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기보단 곁의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나의 우울과 비관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게 상대에게 얼마나 버거움인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삶을 자주 우울하게 여겼고, 비관했다. 그런 내 이야기를 듣던 그분은 어느 날 상처받지 말고 들으라며 "너는 자존감이 낮아."라고 했다. 당시 자존감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나는 그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을 마음 어딘가에 숨겨두곤 자주 꺼내봤던 것 같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고부터 그 말은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자주 상처를 남겼다.
처음에는 그래, 나는 자존감이 낮아.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나를 소중히 대하지 않아.처럼 그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화가 났다. 아무리 그렇게 느껴졌더라도 쉽게 해선 안될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편으론 그분이 나를 아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정말 잘 됐으면 좋겠고, 아끼는 마음이 들 때 쓴소리를 하는 게 나였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내게 "너는 자존감이 낮아."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 말은 내 어딘가에서 나를 상처 내 기도, 상처 난 나를 보살피기도, 스스로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아니다.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길 줄 안다. (물론 기준치는 여전히 높은 것 같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안다. 그리고 섣부르게 누군가의 자존감을 평가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김연수 작가님을 좋아할 수 있고, 나의 자존감을 볼 수 있고, 남의 자존감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설명할 문장들을 솔직하게 써내려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내게 그분은 멘토가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러고 보니 이 정도 사이로 밖에 남지 못한 게 퍽 서운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