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이시 Jun 12. 2022

디폴트 0.75배속

"빨리빨리"라는 대회가 있다면 2등 하기 아까울 정도로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면서 살아온 나였다. 나이가 들 수록 속도가 높아지는 건지, 조급증이 높아지는 건지 분간이 힘들어졌지만 나는 속력을 사랑했다. 이미 또래, 동기 들에 비해 많이 늦은 사회  진입을 했기 때문에 1.0 배속으로 사는 건 죄라고 생각했다. 1.5배 속 정도는 돼줘야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길가다 종종 어지러워서 쓰러지고는 했다. 체력이 약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살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악으로 깡으로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며 센 척을 이어가고는 했다.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오래 버텨주던 줄이 딱 끊어지고 지난해부터 3번의 응급실 여정을 거쳐 나는 나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변경시켜야 되는 챌린지를 맞게 되었다. 


시간이 너무 아까웠던 나는 걸으면서도 강연을 듣거나, 아주 잠깐의 짬에도 책을 읽었다. SNS는 하지 않지만 돌아보면 나에게는 책이 인스타 같은 효과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책에서 강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게으르고 뒤쳐진 것 같은 그 느낌. 책을 읽을수록 성장하는 기분보다 후퇴하는 기분이 들었던 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최근에야 나는 초록색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나무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이어폰으로 메시지를 집어넣지 않자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던 그 자연을 내가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최근 나는 카톡 상태 메시지를 바꿔보았다. OO동 거북이라고. 


걸어서 출퇴근하는 나는 걸어서 20분 걸리는 거리를 느릿느릿 두 배의 시간을 쓰며 간다. 나무한테 말도 걸어보고. "넌 몇십 년째 거기 서있는 거야? 대단하다. 난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어려운데." 흙냄새에 후각을 내어주기도 한다. 나한테는 환각제 같았던 콜라와 커피를 들이붓기를 멈추니 자연이라는 단어에 몸과 마음이 호응하고 있다. 


나는 건강 상 내가 마주하면 안 되는 상황들을 자체적으로 정리해 가고 있는데, 지금까지 정리된 것 중에 가장 명백한 2개는 "빨리"와 "책임감"이다. 누군가 내 뒤에서 걷고 있다면, 진짜 느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느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거북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그대도 편할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억이 선명하다는 고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