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 집은 어디에] 내 기억 속에 첫 우리 집

내 기억 속에 첫 우리 집

by 스테이시

1990년 대 초, 아빠는 첫 차로 엑셀을 구매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에 자신이 붙은 아빠는 우리 가족을 태우고 장거리 운전을 하셨고, 도착한 곳은 송파구 방이동이었다. 방이동 코오롱 아파트. 거기서 차는 멈추고 아빠는 ‘저기가 우리 집’ 라며 소개하셨다. 송파구 방이동에 자가가 있는 4인 가족의 훈훈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이어졌으면 난 이 책을 쓸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약에 당첨되셨는지, P(프리미엄: 웃돈)을 주고 구매하신 건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그 당시 우리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재정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고, 전세입자가 살고 계셨던 것 같다. 멀리서 몇 층이 우리 집인지도 모를 아파트 건물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나와 동생은 단지 멀리 차 타고 와서 지루했을 뿐이었고, 엄마 아빠는 직접 새 아파트에 들어가 살지는 못하셨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집이 있다는 것에 감격하셨을 것이다. 우리 아빠는 감정을 잘 표현을 안 하시지만, 그때는 목소리가 살짝 업 되었던 것이 기억에 난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첫 우리 집에 대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집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그다음 번에 방이동에 방문해서 그 아파트에 갔을 때 아빠는 부동산 중개인한테 말했다.


“가격은 더 안 받아도 되니 빨리 팔아주세요.”


친척분들의 사업에 그 집은 보증이 되었던 것이다. 친척분들의 사업이 망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돌아보면, 이런 이야기는 흔하고 정말 흔했다. 아마 거의 망하기 직전에 보증을 요구하였어도, 가족이 요청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그 시대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빠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조금만 덜 하셨으면 어땠을까….. 엄마가 이혼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보증을 막았더라면. 그럼 가족이 망해가는데도 손도 안 내밀어 준 매정한 사람이라고 친척들이 엄마를 못살게 굴었을까……. 그게 무슨 상상이었든 간에 결론은 그 집을 팔아서 우리 빚이 아닌 빚을 갚아야 했다. 그 집을 팔고도 다 갚지 못한 빚을 아빠는 향후 20년 동안 더 갚으셔야 되는 상황이었다.


쓰다 보니, 엄마가 이혼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이 참 위대하게 느껴진다. 우리 엄마는 보통 사람보다 초초초 긍정적인 특이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견딘 것은 정말 기록적인 것 같다. 그렇게 첫 우리 집이라는 단어는 회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나는 우연히라도 송파구를 지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그 사건 이후에도 그 전처럼 우리는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릴 때 나는 이사하는 날이 좋았다. 이삿짐 아저씨들을 구경하고, 특별한 음식인 자장면도 먹고 말이다. 큰 트럭이 오면 그 차가 마치 내 차 인양 의기양양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어디로 이사를 가지라는 설레 임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이사 날을 매우 싫어했던 것이 기억에 난다. 아빠가 허리디스크에 걸리셨던 이후로 아빠는 무거운 짐이나 가구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떤 한 짐도 들 수 없었다. 그래서 90년대부터는 포장이사를 하자고 늘 말씀하셨는데, 엄마는 20만 원 아끼겠다고 혼자 포장을 하시다가 꼭 힘들어서 짜증을 내고 이삿날 당일에는 몸살이 나고야 말았다. 아빠는 이삿날 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 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부동산, 은행 등을 바쁘게 돌아다니셨을 것이다.


엄마는 이삿 날 6개월 전부터 한숨을 쉬셨다. ‘엄마 우리 이번엔 어디로 가?”라고 해맑게 묻는 나를 괜스레 구박하시도 했다. 엄마는 송파구 방이동이 마음에 못내 한이 되셨는지, 우리는 전세로 송파구 문정동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는 강남 4 구라는 말 대신 8 학군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엄마도 맹모가 되고 싶으셨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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