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코너 배치를 바꿨다. 처음 온 곳인 마냥 쭉 탐방해 본다. 두 개의 단어로 수렴된다. '물질'과 '의미'. 돈 얘기가 즐비하다. 세상을 쫓아가라고 독촉한다. 한편에선 마음을 만진다. 내려놓으라고. 수고했다고.
한 커피 매거진에서 소개한 박이강 작가의 책을 찾았다. 투자은행(IB)을 다닌 그녀는 40대 들어 고민에 싸인다. 남이 보는 '나'와 자신이 아는 '나' 사이의 괴리감이 커져서였다. 그때부터 소설에 끌렸다. 낮에는 자본주의 순종자로 밤에는 무의미와 싸우는 아마추어 소설가로 10여 년을 분투한 끝에 소설집을 냈다. 그녀는 물질과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알아냈다.
며칠 전 전 직장의 상사가 췌장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전형적 회사 인간이다. 이른 나이에 임원이 되었다. 불도저다. 말술이다. 나와는 좋지 않게 헤어졌지만 인간적으로 안타깝다. 상무, 전무면 뭐 하나. 회사의 직책은 일면의 추상이다. 사와 마도카는 <메타 사고>에서, 회사에서 일하는 '나'는 하나의 분신에 불과하고 '나'를 이루는 전체의 합은 훨씬 더 크다는 생각을 품으라고 한다.
모 그룹 계열사에서 리더들을 다면평가했다. 한 명씩 만나서 결과를 디브리핑했다. 상사, 동료, 부하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3자의 입장에서 읽어주는 것이다. 숫자의 이면에 있는 물음표를 꺼내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얘기를 한다. 회사에서의 역할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을 드러낸다. 수긍하기도 섭섭해하기도 반성하기도 하며 묵은 고단함을 스스로 씻어낸다. 나는 렌즈를 비추었을 뿐이다.
서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잘하고 번잡한 소사들을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비추기 때문이다. 컨설턴트로서 한 일은 회사를 모델에 비춰 분석한 것이다. 지금 교수자로서 하는 일도 결국 같다.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풀 렌즈를 쥐어주는 것이다! 회사명, 직책을 걷어낸 내 정체는 이것이었다.
서점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이 많은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 <그래비티>에서 땅을 굳건하게 디디는 마지막 장면이 뭉클한 건, 우주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지구로 돌아와서가 아니라 '내'가 중력을 견디는 이유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