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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수 Dec 02. 2022

말랑말랑

요즘 어떤 상황에나 이 단어, '말랑말랑'을 대입하면 형통한다.


몇 년 전 아내가 요가를 하자길래 속으로 '무슨 요가'하며 마지못해 시작했다가, 지금은 매일 아침을 산山자세로 시작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손끝과 발끝이 매일 아침 조우한다. 내 몸이 인생사 통틀어 가장 말랑말랑하다. (아기 때 빼고.)


듣기 싫은 말에도 그렇다. 쿵푸팬더 포의 뱃살에 악당이 튕겨나가듯이 '내 머리는 말랑말랑' 하다고 속으로 되뇌면 그냥 튕겨나간다. 유재석이 그랬단다. '내게 애정 없는 사람이 하는 충고는 무시하셔라.' 무시하기 위해 날카로운 준비 태세가 필요하지는 않다. 예전 직장 동료가 잘하던 말버릇이 '그럴 수도 있고'다. 양희은 씨는 '그러라고 그래'며 털어버린다. 너도 나도 안 다치는 교묘한 화법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브런치 작가 데뷔하고 열심히 쓰다가 새 직장에 적응하면서 사실상 손을 놓았다. 직업을 바꿔서 더 그렇다. 속내는, 잘 쓰려는 욕심 때문이다. 오늘 부로 말랑말랑 모드로 글을 쓰기로 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그렇다. 서점에 가면 '50대'가 붙은 책 제목이 많다. 딱 내가 타깃이다. 관심이 생겨서인지, 트드여서인지는 모르겠다. 김경록 미래에셋운용 고문은 <데모테크가 온다>에서, 현재 일본의 70대를 보아서는 알 수 없고(그들은 인터넷도 서툴다), 지금 한국의 50대가 70대가 될 때를 상상하라고 한다. 내 또래들이 만드는 미래가 중요하겠다는 감은 있다. 늙었다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에이브라함 링컨도, 피터 드러커도 그랬단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The best way to predict your future is to create it). 위인전 버전으로는 거룩한 사명으로 들릴지 모르나, 길이 어디 있나 고민하지 말고 그저 다음 걸음을 놓으면 된다고 해석하련다. 미래는 말랑말랑하다.


나의 노후 대비책을 살짝 공개하면 이렇다. 노후에 중요한 Top 3는, 아내, 아이들, 나 자신이다.

아내와 다투었을 때 정신이 가장 혼미하다. 초록이 우거지고 햇살이 따사로운들 아내와 잘 지내는 것만큼 정신 건강에 이로운 것은 없다.

아이들의 장래를 내 자산과 연결 지으면 이것저것 다 꼬인다. 아이들의 장래는 아이들이 가진 독립심의 몫이다. 안타깝게도, 오지에만 내놓지는 못하고 온실과 오지를 오가게 하고 있다. 독립심 없는 아이는 부모에게 고통이다.

나 자신에게는 세 개의 시점이 있다, 출생일, 지금 시각, 사망일. 사망일은 알 수 없다는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하면 지금 시각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는 좋은 말을 참 많이 했다.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We're here to put a dent in the universe. Otherwise why else even be here?)'. 우리는 누구나, 죽은 상태가 디폴트인 우주에서 찰나의 생명을 가진 이상한 존재다. 그래서 아름답다. 로버트 그린이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들려준 얘기도 그렇고, 김상욱 경희대 교수가 절친의 죽음을 받아들인 방식도 그렇고(유퀴즈 출연 회차 참조), 이어령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하신 고백이 그렇다. 돈만 벌다 죽기는 싫다. 유산만 더 남길뿐이다. 지금 시간부터 (알 수는 없는) 사망일까지 매 순간이 소중하다고 자각하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노후대비책이다. 이보다 말랑말랑할 수는 없...지만,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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