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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Mar 19. 2019

아파서 쓸 수 있는 서사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된다

 버리지 못한 물건이 늘었다. 오래된 아이섀도와 립스틱, 대학교 전공 서적, 대학원 교재들. 쓰기 아까운 물건도 쌓였다. 옷장에 고이 모셔둔 새 니트와 원피스. 반짝이는 귀걸이. 7년 전, 방 청소를 하는데 쌓아둔 물건들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과거의 내가 그리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과 미래의 나에게나 어울릴 것 같아서 손대지 못하는 것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집착과 함께 비어있는 현재가 보였다.     


  당시는 재활에 온 에너지를 쏟는 중이었다. 하루빨리 나아야 했고, 나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밥도 치료받기 위해서 애써 먹던 때였다. 온몸의 근육이 질긴 끈으로 칭칭 감겨서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통증. 경직된 얼굴 근육 때문에 표정 짓기도 어려웠고, 턱과 몸은 더 많이 굳은 왼쪽으로 계속 돌아갔다. 비정상인 이 상태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간. 현재는 어서 회복해서 학교나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사놓고 십 년째 입지 못한 인디핑크 모직코트와 시크한 블랙 원피스처럼 아끼던 나 자신도 붙박이장에 같이 넣어두었다. 오늘의 나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모자란 존재였다.      


 육체의 아픔이 마음을 단단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몸이 병들면서 마음도 함께 병들어 가는 것이 두려웠고, 몸은 어쩔 수 없어도 마음까지 병드는 것은 막고 싶었다. 몸의 통증과 마음을 분리하려 노력하며 아플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서 갑자기 몸이 나빠져도 마음은 이전처럼 휘청거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내가 아픈 몸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오래된 물건들과 옷가지들에서 비어있는 ‘현재의 나’가 보였다. 마음만 내 것이고 몸은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모순이 나를 찔렀다. 마음과 몸을 차별하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차별하고 있는 나를 인정해야 했다. 오늘 허락된 만큼의 내 모습을, 부족하고 아픈 모습 그 자체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는지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은 늘 자신이 수영을 잘한다고 느낄 테고,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치는 사람은 자기 실력이 자기 생각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영영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샹커 베단텀 <히든 브레인> 중에서-


 몸이 아프다는 것은 흐름을 거슬러서 헤엄쳐야 하는 일이다. 잠자고, 밥 먹는 일부터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불편해진다. 통증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을 보내고, 음식을 먹기 전후에 턱을 마사지해야 하고, 멀리 외출이라도 하는 날엔 최소한 출발 세 시간 전부터 준비해서 굳어진 근육을 풀어야 한다. 통증을 내내 참느라 지쳐서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기절하듯 쓰러진다. 출근하듯이 병원에 가야 하고, 몸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운동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역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온 힘을 다해 애써도 제자리를 맴도는 생활이다. 그리고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점점 멀어지는 외로움과 서러움도 감당해야 한다. 위의 말처럼, 흐름을 거스르는 물결 위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내 실력이 생각보다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 역류에 휩쓸려 물살을 거스르다 보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폄하하게 된다.      


 “뭘 했는데 일주일 만에 몸이 이렇게 다 굳었어요?”


 지난달 설 연휴에 오랜만에 3일을 쉬었다. 연휴 끝나고 간 병원에서 이렇게 물었다. 병원이랑 헬스장이 쉬는 날은 백수인 나도 공식적으로 맘 편히 쉴 수 있는 휴가이다. 치료도 받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책을 보면서 쉬었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누워서 책을 읽을 때도 침대에 놓여있는 다양한 종류의 마사지 도구를 허리, 등, 다리에 깔고 몸을 굴리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쉬면서 이틀, 삼일이 지나자 등과 갈비뼈 부분의 근육이 조여 왔다. 숨 쉬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졌다. 그래서 결국 밤을 새우고 병원에 갔다. 나는 뭘 한 게 아니라 뭘 안 했다고 대답했다. 그저 며칠 쉬었을 뿐이라고. 잠시 멈추었을 뿐인데 내 몸은 역류에 휩쓸려 저만치 밀려나 있었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다. 하지만 일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삶을 오래 살다 보면 그 24시간마저도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삶의 '저자성(authorship)'을 이야기하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설명하고 반성하면서 자율적으로 써 내려가는 저자로서의 삶이 있다고.(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p186 ) 살아간다는 것이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26세에 갑자기 다른 장르의 작가로 변신한 셈이다. 대중적인 드라마를 쓰다가 실험적인 독립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예산과 배급망도 없는데 지루한 서사를 계속 써 나가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내가 쓸 수 있는 서사는 하찮아졌고, 오랫동안 쓰고 싶은 다른 서사를 기웃거렸다.      


 현재의 내 모습이 지금의 최선이라고 주문을 외우곤 하지만, 아직도 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자신하긴 어렵다. 하지만 거스르는 물결 위에서 흐름을 타는 나만의 방법을 연습하고 있다. 몸이 아플 때마다 몸에 대해 공부하고 더 많이 움직인다. 해부학과 중의학을 공부하고 꾸준히 운동하면서 스스로 어느 정도의 통증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만 지내다가 작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씩 책 읽고 글 쓰는 모임에 참여하며 글과 삶을 나눈다. 특별하고도 평범한 시간을  통과하는 나만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일상의 나’를 회복하고 있다. 아파서 할 수 없는 일들보다 아프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삶을 조금씩 고쳐 쓴다. 이전처럼 휩쓸리지 않는 데만 집중하지 않고 이제 역류 위에서 나만의 영법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흐름을 타는 것처럼 우아하고 강력하게 헤엄치지는 못하더라도 새로운 영법의 매력을 발견해 나가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많은 물건들을 버렸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이전처럼 불편하지 않다.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나조차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법을 훈련한다. 하지만 수용하는 삶을 살고자 마음먹어도 미래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역류가 잠잠해지는 어느 때, 오랜 시간 익혔던 기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는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순류를 타는 다른 이들과 아득하게 멀어진 나를 절감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차이를 수용해야 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받아들임이란 비장한 결심이 아니라 매 순간의 투쟁이다. 약해지는 것이 두려워 강해지려는 투쟁이 아니라 약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투쟁이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일이다. 그 과정을 통해 믿음과 삶을 고쳐 쓸 수 있다는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의 저자’로서의 창의성을 조금씩 일깨운다. 오늘도 글을 쓰고 삶을 써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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