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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Mar 03. 2019

고통 속의 나비

모든 아픔도 살아있는 순간이었다

 장 도니미크 보비의 실화를 다룬 영화 ‘잠수종과 나비’. 프랑스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어느 날 운전 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정신은 멀쩡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보비에게 의사는 말한다. 이전 같았으면 이미 죽었을 병이지만 의학의 발달로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는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이게 사는 거야?’ ‘이게 살아있는 거야?’    

      

 나도 오랜 시간 내 삶을 향해 비슷한 질문을 하곤 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 감금 증후군으로 왼쪽 눈만 깜박일 수밖에 없는 보비보다는 훨씬 자유로웠지만, 오랜 시간 몸을 괴롭히는 병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그 안에 단단히 감금시켰다.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갇히지 않는 무엇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비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왼쪽 눈을 깜박거리며 글을 썼다. 상대방이 불러주는 알맞은 알파벳에 눈을 깜빡이는 방식으로 하나하나 글자를 써나갔다. 그에게는 왼쪽 눈 말고 마비되지 않은 게 둘이 더 있었다. 상상력과 기억.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남아있는 것들을 골똘히 바라보게 되는 시간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남아있는 것들로 새로운 걸음을 딛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십여 년을 수술과 치료에 삶을 쏟아 부어도 몸은 노력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허공에 발을 디디고 있는 불안함,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오랜 시간의 고통이 자산이 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보았다. 글쓰기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글쓰기의 첫 번째 관문은 ‘고통 속의 나’에게 다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굳이 잊으려고 한 적도 없지만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처음엔 버거웠다. 혼자 일기처럼 끼적일 때는 나의 생각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독자가 상정된 글은 달랐다. 고통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서 ‘그때의 나’를 보여줘야 했다. 턱뼈가 녹는 통증으로 잠 못 들던 밤, 미국에 가서 수술대에 오르던 기억, 온몸에 번지는 통증과 하혈 때문에 휘청거리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을 반복했다. 처음엔 방법을 몰라서 서성이기도 하고, 서글퍼서 머뭇거리기도 했다. 글을 써 내려가면서, 어둠 속에 갇혀있는 과거의 나를 서툰 언어로 조금씩 풀어주었다. 때로 흐느끼고 때로 들썩거리며 고통을, 삶을 다시 해석했다.          


 첫 관문을 통과하자 무엇을 쓸까 고민하는 시간은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왜 이렇게 아프지’라는 생각을 비집고 ‘무엇을 쓸까’, ‘어떻게 쓸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해 나갔다. 글을 쓰려고 고민하는 시간은 일종의 피난처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하얀 공간 위에 키보드를 두드리면 머릿속에서 빛나던 생각들은 허공에 떠다니는 부유물로 전락했다. 부족하고 헐거웠다. 채워야 할 빈 공간이 여기저기 두드러졌다.        

  

 앞에 놓인 커다란 장벽을 발견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세심한 관찰자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관찰하지 않는 사람으로 훈련되어 있었다. 더듬이 없는 곤충 같았다. 원래 감각적이라기보다는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기도 했지만, 아픔을 겪으며 애써 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오래 육체적인 고통을 감당하면서 무너질 때마다 감각의 스위치를 하나하나 끄면서 마음을 지켰다. 턱뼈가 녹아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부터 거울은 물론, 고개를 들어 하늘의 구름을 쳐다본 적도 없었다. 흘러가는 계절의 소리와 향기에도 무감각했다. 머리가 아파서 TV도 영화도 책도 거의 보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를 몸속에서 잡아당기는 통증을 달고 살면서 웬만한 통증은 아프지 않은 거라고 스스로 세뇌시켰다. 의사들의 무책임하고 절망적인 말들도 무심히 넘기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6년 전 휴대폰을 바꾸며 이전 휴대폰의 데이터를 옮기고 있었다. 직원이 놀라며 스마트폰에 사진이 하나도 없다고 신기해했다. 보고 싶은 것도 기억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스마트폰 사진 셔터를 3년간 한 번도 누르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삶이 통증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 감각에 무뎌지고 마음에 집중하며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런데 나를 아픔에서 지켜주었던 무기가 글을 쓰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어 가로막고 있었다.          


 보비는 이렇게 썼다. ‘잠수종이 한결 덜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삶의 어느 부분이 꼼짝없이 갇히면 마음과 정신은 새로운 자유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자신만의 나비가 날아오른다. 내게도 그랬다. 삶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에 대해, 잘 됨과 안 됨의 기준에 대해,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자유로워졌다. 그 나비가 삶을 지탱하게 해 주었고,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 새로운 지평을 날아보니 나의 나비는 온전한 나비가 아니었다. 감각을 잃은, 더듬이가 퇴회된 나비였다.          


 이제 녹슬고 짧아진 더듬이를 닦아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다시 비행을 시작한다. 이전에 지나쳤던 빛깔과 맛과 향기와 촉감을 세밀하게 느끼며 고통 속의 나에게로,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무디어졌던  감각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상을 풍성하게 물들인다. 잃어버렸던 언어를 되찾은 사람처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흘려보내던 영화의 대사를 곱씹고, 전시회 그림 앞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낙엽 밟는 소리에도 귀 기울인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에 감탄하며 사진 셔터를 누르는 날이 늘어갔다. 글을 쓰면서 장벽에 부딪힐 때마다 삶이 조금씩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잠수종과 나비’ 영화를 보고 책을 찾아 읽었다. 보비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의 글에는 갑갑하고 거대한 슬픔 속에 유머와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보비가 15개월 동안 20만 번에 달하는 깜박임으로 알파벳 하나하나를 짚으며 130여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완성했다는, 인간승리의 이야기보다 중요한 사실이 내게 다가왔다. 그가 머릿속으로 글을 구성하고 쓰면서 행복하고 기쁜 순간이 많았다는 것. 어떤 문장에서는 꺼내지 못한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온몸이 갇힌 상황에서 26개의 알파벳을 조합하며 잠시라도 행복할 수 있는 놀이라면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내게도 이미 선물을 여는 열쇠가 곁에 있었다.      


 글을 쓰려고 하얀 모니터 앞에 앉으면 여전히 막막하다. 절실했던 이야기들이 왜소하고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날아오르는 고통이 잠겨진 고통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마법을 부릴 때, 알게 된다. 부딪히고 깨지며 부족함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살아있는 삶이라는 것을. 글을 쓰는 것은 '이게 사는 거냐'고, '이게 살아있는 거냐'고 묻던 내게 '그 모든 아픔도 살아있는 순간이었다.'고 삶으로 대답하는 일이다. 아픔 때문에 단절되었다고, 삶이 멈추었다고 여겼던 지점으로 날아가서 그 순간을 생생한 삶으로 매듭지어 잇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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