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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Apr 23. 2019

내게 가장 좋은 상황

이번에도 기대와 달랐다


 “자궁을 적출하거나 일부만 남기거나 둘 중 하나예요. 일부만 살린다고 해도 정상 조직이 별로 없어서 임신은 어려울 겁니다. 어떻게 할지 선택하세요.”     

“저, 잠깐만 시간을 좀..”     


 2017년 8월 말, 어수선한 응급실 한가운데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맴돌다 마음으로 툭 떨어졌다. 마치 상한 사과를 그냥 버릴지 상한 부분만 도려낼지 간단한 선택을 하라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눈물이 날까 봐 괜히 눈을 깜빡여본다. 이미 각오한 일이라도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은 마음 한 구석을 칼로 베인 듯 시리다.     


 전날 밤, 저녁을 먹고 운동 가려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팠다. 오른쪽 아랫배가 쿡쿡 쑤시고 찢어지는 통증. 1에서 10까지 표시하라면 10의 강도. 이런 강도는 근육이나 근막이 찢어질 때 종종 경험했던 터라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잠시 누워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줄지 않고 점점 심해졌다. 속이 울렁거리더니 구토를 했다. 맥박이 빨라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허리를 펼 수조차 없는 통증이 3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아. 오른쪽 난소의 혹이 파열되었구나.’ 거실로 나가서 엄마에게 응급실에 가야한다고 말하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사실,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8cm 정도로 커진 난소의 혹이 파열되거나 꼬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7년 전 처음 검진했을 때, 자궁근종은 약 13cm, 난소의 혹은 5cm였다. 처음 알았을 때부터 자궁을 온전히 살리기 어려울 만큼 큰 근종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당장 보이지 않는 자궁이나 난소에 마음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근육통에 하루 종일 시달리고 있어서 재활을 하느라 수술을 미뤘다. 처음엔 또다시 전신마취를 할 정도로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는 운동을 쉬면 급격히 나빠지는 근육 경련과 경직 때문에 수술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재활은 마라톤 경주처럼 길고 지루한 일이었고, 혼신을 다해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멈춘다는 것은 정지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했다. 수술하면 그동안 재활하며 차곡차곡 쌓아 온 노력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래서 난소의 혹이 파열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내가 내리지 못하는 결정을 몸이 내려준 것 같은 홀가분함이 통증과 함께 뒤섞여 밀려왔다.     


 응급실에서의 CT촬영 결과는 예상대로 난소 혹 파열이었다. 하지만 난소보다 자궁근종이 더 문제였다. 열흘 전 동네 산부인과 검사에서 13cm였던 자궁근종은 정밀검사 결과 16cm였다. 난소 혹만 있다면 응급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거대 자궁근종 때문에 당장 응급수술은 어려웠다. 진통제와 항생제를 맞으며 복강에 흐른 피가 염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치하면서 3일 후 수술을 하기로 하고 입원실로 옮겼다.     


 야속하던 마음은 직접 mri 결과를 보면서 누그러졌다. 의사가 내 쪽으로 돌려 보여 준 화면엔 커다란 공이 보였다. 자궁의 크기가 7-8cm인데 내 근종은 자궁의 크기의 두 배인 16센티. 넓이는 길이의 제곱이고, 부피는 길이의 세제곱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상상했던 손바닥만 한 혹이 아니라 큰 공이 배 속에 있었다. 아니 꼬리뼈부터 배꼽까지 커다란 공밖에 안보였다. 의사는 “이게 다 근종이에요. 오른쪽 일부 말고 자궁이 다 늘어나서 정상 조직이 많지 않아요. 근종이 장기를 다 누르고 있는 거 보이죠. 근종이 장기들과 유착되어 있다면 수술이 더 어려워요. 그동안 소화도 안되고 변비도 있고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참았나요.” 이것저것 따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뱃속의 큰 공이 별로 힘들지 않게 느껴졌던 또 다른 삶의 무게를 되짚으며 길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자궁을 적출하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미혼이긴 했지만 아이를 가지기엔 늦은 나이이기도 했고 출산의 계획도 없는데, 자궁이 없어지면 불편한 생리와 지긋지긋한 부정출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없어질 텐데, ‘떼어낼게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다만 아이를 품지 못한 채 손상된 자궁처럼 내 삶도 성취 없이 훼손되어가고 있다는 상실감이 밀려왔을 뿐이다.     

수술 전날 갑자기 (예정일보다 3일 먼저) 생리가 시작되었다. 자궁을 적출하지 않을 거라면 수술을 연기해야 했다. 다행히 파열된 난소의 통증이 줄어들어서 2주 후로 수술을 연기하고 진통제와 항생제를 한웅큼 처방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수술 날, 레지던트가 여러 장의 수술동의서를 내민다. ‘복강경으로 수술을 시작하지만 언제든지 개복을 할 수 있다’, ‘자궁을 보존하려 하겠지만 어려울 경우 적출을 할 수 있다’, ‘장기와의 유착이 심할 경우 장기에 손상이 가거나 장기를 수술할 수 있다’ 각각의 서명란에 사인을 써넣었다.     


 별로 바랄 것이 없는 상황이라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상황이 나빠서 배를 열어봐야 안다는, 정확한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고 말한 의사의 말에 불안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 내게 좋다고 확신하기 어려웠다. 복강경은 수술시간이 길고 어려운 대신 회복이 빠르고, 개복은 절개 범위가 넓어서 회복이 느리지만 정확하게 수술하기는 좋다. 자궁을 살리려고 노력해봤기에 수술하다 적출하게 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수술실에 들어가는 기도도 간단했다. ‘무엇이 가장 좋은지 나도 잘 모릅니다. 내게 가장 좋은 상황으로 인도해 주세요.’     


6시간이 넘는 수술이 끝났다. 회복실에서 마취가 풀릴 무렵, 간호사가 배를 들춰본다. “복강경으로 수술 마치셨네요.” 회복실에서 나와 병실로 올라가는데 엄마와 오빠, 외숙모가 보인다. 외숙모가 “수술 잘 되었고, 자궁도 살렸대.” 병실에 올라와서 엄마가 이야기한다. “대장과 유착이 심했지만 잘 떼어냈고, 대장을 건드려서 3일 더 금식해야 한대. 그런데 난소의 혹 때문에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한다던데...”     


 파열되었던, 물혹인 줄 알았던 난소의 혹은 자궁내막 종이었다. 초콜릿 낭종이라고 불리는 흑갈색 피를 머금은 혹이 터졌고, 이미 내 복강은 2주 동안 검게 물들어 버려서 닦아낼 수 없었다고. 작은 점 만 있어도 증식할 수 있어서 레이저로 소작해야 한다는 이 내막증 세포는 이미 복강 전체에 퍼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자신의 생리혈이 자기 조직을 공격해서 어디서든 증식할 수 있고, 장기의 미끈한 막을 파괴해서 장기를 유착시킨다는 생소한 병. 거대 근종만 생각하느라 난소의 혹은 염려도 안 했는데, 재발률이 40-80프로까지 된다는 내막증이 다시 나를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변수로 지나갈 것 같았던 고통이 상수가 되어 꿈쩍 않고 버티고 있었다. 커다란 공만 한 근종을 떼어내면 조금 홀가분할 줄 알았지만 고통의 중력은 강력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중력에 이끌려 바닥까지 떨어지는 순간, 믿음이 섞인 상상을 했다. 바닥을 힘차게 ‘쿵’ 하고 구르면 중력을 벗어나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용기 내어 바닥을 힘차게 디뎠는데 더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튼으로 가려져 소리가 다 들리는 6인실 병실은 큰 소리 내어 울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애써 재미있는 웹툰을 보기도 하고 병문안 온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도 나눠보지만, 의사가 보여준 복강에 퍼진 내막증의 검은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병실에 혼자 남은 밤, 머리맡에 놓인 마종기 시인의 시집 <이슬의 눈>을 집어 들었다.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는 먼 길의 끝의 평화.

네 간절하고 가난한 믿음이 우리를 울린다.     

오늘은 날씨가 밝고 따뜻하다.

하늘을 보니 네 얼굴이 넓게 떠 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몇 개로 보인다.

너같이 착하고 맑은 하늘에

네 얼굴 자꾸 넓게 번진다.

눈부신 천 개의 색깔, 네 얼굴에 번진다.     


< 동생을 위한 조시 중 '맑은 날의 얼굴' >     


갑작스럽게 사고로 죽은 그의 동생을 애도하며 쓴 시들을 읽으며, 그의 슬픔을 핑계 삼아 흐느꼈다. 누구의 삶에나 스며들어 있는 중력의 무게를 헤아려본다. 내가 기도했던 ‘내게 가장 좋은 상황’은 이번에도 내 생각과 달랐다. ‘가장 좋은 상황’은 중력에서 벗어난 삶이 아니라 떨어지는 중에도 견딜만한 힘이 생기는 것인지도. 버거운 일을 겪어내면서 단단해지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오랜 중력의 끌어당김 속에서 영혼이 날아오르는 은총이 이미 조금씩 깃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우선은 집에 가서 펑펑 목 놓아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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