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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드 Jan 13. 2019

허물어지는 삶이 생을 일깨운다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증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로마에서 승전하고 돌아온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이 말을 외치게 했다. 순간의 승리에 도취되지 않도록 죽음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성공과 환호 한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각성은 삶의 균형추가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스며있는 순간에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죽음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죽음이 보이고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곳, 그래서 오히려 삶을 환기시키는 곳이 있다.
 
 6인실 병실. 저녁 8시 이후 보호자가 머물지 않는 포괄 병동의 밤은 일찍 시작된다.      
 
 맞은편 복도 쪽 환자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50대 중반의 여성. 밤만 되면 랩을 하듯이 아프다고 중얼거린다. 종이 같은 것을 찢고 구기는 소리도 들렸다. 10분마다 간호사를 호출했다. CT 촬영을 하러 가기 위해 온 조무사가 침대를 건드렸다고 고함을 질렀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다 깼다. 전날 수술을 받은 나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벌써 삼일 째다. 첫날은, 암 환자니까 아파서 그런가, 안타까운 마음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수술 날이었던 둘째 날은 어차피 내가 아파서 잠을 못자니까 그냥 넘겼다. 셋째 날, 깨달았다. 매일 이러면 입원 내내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암 수술을 하고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했다는 환자. 처음엔 정말 아파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낮에는 몰래 만두국도 시켜 먹고 갈비탕도 시켜 먹는다. 불 켜고 끄는 것도, 커튼을 열고 닫는 것도 6인실 병실에서 자기 마음대로다. 쿠팡에서 택배를 시키고 쿠팡맨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우리 엄마한테 기저귀를 사와라, 김밥을 사와라, 자기 쓰레기통을 비워달라고도 했다. 수시로 응급 벨을 누르고 간호사들을 호출해서 소리를 지르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의사가 오면 얌전한 고양이처럼 온순해졌다. 나는 밤새 소란에 시달렸고, 다음날 아침이 밝자 병실을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옮긴 병실 중 세 명이 그 환자 때문에 피난 온 사람이었다. 새로 옮긴 방 창가 쪽 환자는 수액 걸이에 여러 개의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중환자라는 일종의 표시다. 간암과 췌장암이라는 50대 초반의 여성은 음식도 거의 못 먹고 수액에 의지하고 있다. 밤이 되면 고통스러워하며 신음 소리를 가늘게 내뱉었다. 몰핀(마약성 진통제)에 의지하고 있다. 이따금씩 주렁주렁 달린 링거를 달고 움직인다. 낮에는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혼자 사느라 힘들게 일하고 아끼기만 하고 살았는데, 암에 걸리고 보니 그게 아쉽단다. 다행이 좋은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놓아서 보험비가 많이 나왔다며, 그 돈으로 딱 십 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가장 예후가 안 좋다는 췌장암과 간암. 나날이 야위어 가는 몸과 점점 검게 변하는 그의 안색을 보면서 십 년이란 시간이 우주의 기원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의 아련함이 마음을 찔렀다. 며칠 전, 같은 방에 있던 담낭암 환자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다고 이야기하며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다. 같은 병실에서 숨 쉬다가 하루아침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빈자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조심스레 걷는 사람의 오늘 하루는 얼마나 간절할까.     
 
 두 환자의 공통점은 미혼의 50대 여성, 암 환자이다. 많은 시간 홀로 투병하고 있고, 살고 싶어 한다는 것도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로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학이 발달해서 이제는 암이 곧 죽음을 의미하지 않지만, 삶의 한쪽이 허물어지는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허물어지는 삶은 사람의 민낯을 드러낸다. 허물어지는 매순간은 리허설이 없는 혹독한 실전이다. 우리는 창창한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법을 배웠을 뿐 고통을 마주하는 방법을 미리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낯선 고통이 삶을 장악할 때 늘 서툴다. 모든 사람을 밀어내는 옆방의 그 환자도 어쩌면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온 낯선 시간을 받아들이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질병을 받아들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질병을 앓고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일지도. 문득 그 환자가 안쓰러워졌다.     
 
 나는 진료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커튼을 치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의사가 모니터로 보여 준 수술 장면이, 검게 물든 복강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고장 난 필름처럼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휴대폰을 집어서 ‘자궁내막증’을 검색했다. 수술을 받고 자궁의 커다란 혹을 이제 막 떼었는데, 생소한 병명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이주일 전에 파열되었던 혹은 단순 물혹이 아니라 자궁내막종이었다. 복강에 내막종의 검은 피가 완전히 스며들어서 제거할 수 없었다는 의사의 설명과 함께 “재발할 가능성이 큽니다” 라던 목소리도 선명했다. 네 번째 수술 직후 다섯 번째 수술의 가능성을 예고 받은 셈이었다. 고등학교 때 턱관절을 다친 이후 이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팠고, 그대부분의 시간은 수술과 연결되어 있었다. 음식 조절, 운동, 치료 모두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다. 그런데도 몸은 아픔에 매여 일정거리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수술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외롭게 죽어가는 내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수술 때마다 내 곁을 지키는 엄마는 이제 일흔이 넘었다. 결혼도 하지 않아서 남편도 자식도 없는데 나중에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병실의 저 두 환자들처럼 홀로 외롭게 수술을 받으면서 지내야 하는 걸까. 네 번의 수술. 칼로 피부와 근육을 절개하는 과정. 네 번의 전신마취. 쪼그라들었던 폐에 쌓인 마취약을 뱉어내며 고통 속에 회복실에서 깨어나는 일. 계속 투여되는 항생제와 진통소염제. 수술은 몸의 일부는 회복시키지만 다른 부분을 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미 폐도 심장도 갑상선도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 죽음이 깃든 병실의 공기를 마시면서 죽음을 떠올려본다. 외롭게 병들어 수술을 받으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갑자기 죽는 게 더 나을까. 그렇다면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수 없겠지.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도 잔인한 일이지 싶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서서히 죽는 것도 갑자기 죽는 것도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병원 복도에 지지대를 붙잡고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 곁엔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녀를 부축하고 있다. 그녀가 걸음을 뗄 때마다 ‘하나’, ‘둘’ 하는 아버지의 구령소리가 들렸다. 자궁근종인줄 알았는데 수술하려고 열어보니 자궁내막암이었단다. 그래서 자궁과 자궁 경부, 대동맥 림프절까지 절제해서 아직까지 혼자서 걸을 수 없다. 수술 후 일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걸음마 연습을 하고 있다. 그 힘든 시간을 겪고도 “아직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 년 동안 매일의 노력이 쌓여 “이만큼이나” 걸을 수 있게 된 것일까. 내 삶도 언제나 그 사이에서 방황했다. 여러 번의 수술을 받고 긴 재활의 시간을 겪고도 고작 “이만큼 밖에” 나아지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이만큼의” 삶을 얻어낸 것인지. 누구에게나 최선을 다해 걸어도 뒷걸음질 치는 것 같은 시간이 있다. 그래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절룩거리면서라도 통과해야 하는 길이 있다.
 
 누구도 아픔과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갑작스레 또는 서서히 삶의 한 모퉁이가 허물어지는 시간을 건너가야 한다. 허물어지는 순간을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나를 일깨웠다. 그들은 어떤 위로나 격려의 말보다 강력하게 삶을 환기시켰다. 허물어지는 시간 또한 생생한 삶 그 자체라고. 나약해지는 모습도 삶을 충만하게 채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죽음과 아픔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는 하나의 이유를 붙잡고 무너지는 마음의 균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모든 슬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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