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전날 마신 술이 조금 과했다. 언제나처럼 술 마신 다음날의 지하철은 어김없이 헛구역질을 유도한다. 9시까지만 마시기로 했는데, 시간만을 생각하느라, 흡수되고 있는 알코올의 총량에 대해 놓쳐버렸다. 술자리는 비록 9시에 끝났지만, 들이마신 총 알코올의 양은 12시까지 마신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맥주 대신 소주로만 달렸으니, 총량은 더 많았을 것이다. 집에는 10시쯤에 왔던 듯한데, 정확하지 않다. 마신 술은 생각 안 하고 일찍 집에 간다고 괜스레 지하철을 탔다가 졸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계단을 내려가던 기억을 마지막으로, 눈을 떠보니 말 그대로의 타는듯한 목마름과 함께 방광 용적의 한계를 느끼며 눈을 떴다. 정신은 어렴풋이 돌아왔지만, 몸을 움직일만한 기운과 의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자는 것도 아니고, 안 자는 것도 아닌 연옥과도 같은 상태에서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싱그럽기는커녕 마치 흡혈귀의 몸을 태워버릴 듯이 비춰온다. 그리고 재가 돼버리기 싫은 흡혈귀마냥 어그적 어그적 욕실로 향한다. 어제 미처 샤워도 못 하고 잠이 든 듯하다. 양치를 한 기억도 나지 않아, 양치를 먼저 한다. 칫솔이 앞니에 경우 닿았을 뿐인데, 헛구역질이 난다. 무언가를 닦는다기 보다는 살살 치약을 바른다는 느낌으로 이빨에 접근했지만, 위장 깊숙이 에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강 헹궈내고,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하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며, 손과 말이 내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몸을 닦고 머리도 말리고 주섬주섬 옷도 갖춰 입는다. 몸에 조이는 옷은 안 된다. 최대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가장 큰 적은 자꾸 헛구역질을 올리는 내 위장이다. 냉장고에서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탄산의 기운이 남아있는 검은 탄산음료를 마시며, 당을 끌어올린다. 위장은 음식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찬물에 밥을 말아 세 숟가락만 먹자고 협상을 한다. 대신 속 쓰림을 달래줄 약을 함께 넣어준다.
집을 나서서 바깥공기를 쐬니 좀 낫다. 세 숟가락의 물밥과 속쓰림약이 위장과의 협상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협상의 결렬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근길의 2호선은 위장의 평화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껏 헐렁하게 입은 옷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강제적으로 허리 사이즈를 줄이고 있다. 역이 한두 개 지나가면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안쪽 기둥을 잡고 서게 되었다. 위장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듯이 무언가를 자꾸 아래로 내리는 대신 위로 올리려 하고 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실비실 나고 당장이라도 뛰쳐 내리고 싶지만, 문까지 가는 길조차 험난할 뿐이다. 아닌 정확히 길은 보이지도 않는다. 자리에 앉아 갈 수라도 있으면 사람들로부터의 압박은 벗어나 위장과 다시 협상을 해 볼 수 있을 텐데, 앞자리의 아저씨는 순환선을 몇 바퀴를 돌더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진 듯하다. 심지어 옆에는 아침 출근시간부터 웬 커플이 딱 붙어서 지옥 속에서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듯이 희희낙락하고 있다. 이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가질 여유조차 없다. 두세 개의 역을 지나며 한계치에 다다름을 느끼면, 자꾸 손으로 입을 막아야 한다는 행동지침을 연습하게 된다. 야속하게도 내 앞의 아저씨는 돌아가셨는지 확인해야 싶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계셨고, 굳이 자리가 필요 없어 보이는 듯한 커플의 앞자리가 비었고, 당연스럽게 남자는 여자에게 얼른 앉으라고 하며 사랑스러운 눈빛과 몸짓을 남발한다. 두세 시간은 족히 더 주무실 수 있을 듯한 내 앞의 아저씨가 갑자기 고개를 똑바로 세우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위장의 최후통첩이 다가올 시점에 신이 주신 마지막 기회이다. 아저씨는 급하지 않다. 현재 역 이름을 확인하시고는 다시금 깊은 잠에 빠질 준비를 하시는 듯하다. 이제는 정말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그즈음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 연장전에서 안정환의 결승골처럼 예상치 못하게 아저씨가 일어났다. 내 눈에는 그 빈자리가 천국행 열차의 1등석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돌리려는 순간, 그 커플의 여자가 옆으로 잽싸게 자리를 옮겨 내가 앉아야만 했던 그 1등석에 앉았고, 지난 친 애교와 세상에 둘 밖에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하는 듯한 눈빛으로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 자기 남자 친구를 앉으라고 손짓한다. 내 자리인데, 내 자리인데, 말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목구멍까지 무언가가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남자 역시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가 자기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 세상 그 어떤 선물보다 감동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철판처럼 두꺼운 얼굴에 살포시 미소를 띄우고 여자 친구가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려 엉덩이를 들이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바로 앞, 숙면의 정석을 보여주시던 아저씨가 앉아 있던, 그리고 지금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가장 비열한 짓에 대한 대가로 참혹한 벌을 받아 마땅한 커플의 여자 친구 앞으로 강력한 헛구역질을 한다. 허리는 90도 보다 깍듯하게 굽혀 투표 전날 국회의원보다 예의 바르게 숙여지고, 위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고약하고 숙성된 알코올을 비롯한 지방성 안주들의 삭힌 냄새가 뿜어져 나오고, 동시에 SF 영화에서 나오는 하등동물처럼 보이는 괴물들이 죽을 때 나는 듯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수백 명은 족히 될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모두 무시한 채 남자 친구만을 바라보던 그 여자는 자기 얼굴로 뿜어져 나오는 지옥에서 올라온 냄새와 절규에 혼비백산하여, 우샤인 볼트보다 빠른 속도로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다 사랑스러운 남친의 엉덩이에 그 속도 그대로 얼굴을 심하게 부딪혔고, 남친의 엉덩이에는 그 여자의 짙은 화장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리고 나는 다행스럽게 원래 내가 앉았어야 할 그 자리에 앉아, 위장의 분노를 달래며, 아저씨가 왜 그렇게 숙면모드를 취했는지 이해하며, 똑같은 자세를 취한 채 눈을 감았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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