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가 될 것인가? 소인이 될 것인가?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신도림에서 잠실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은 신림을 지나면서 빽빽한 아마존의 열대 우림을 능가하는 밀도와 그 습도를 넘어서는 짜증을 유발한다. 힘겹게 혹은 차라리 온몸의 힘을 빼고 사람들의 물결에 몸을 맡겨 버린 채 서 있던 와중에 눈앞의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띈다. 수년 전부터 서울시에서 시행하고 있던 임산부 배려석은 말 그대로의 배려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지속적인 개선책을 내 놓고 있는 상황이다. 핑크색으로 누가 봐도 눈에 띄일 정도로 도드라져 보이지만, 눈앞의 임산부 석에는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젊은 사람들 출근하는 시간에 지하철을 이용하시는 것을 보니, 젊은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러 가는 길일수도, 혹은 다른 반복되는 일상의 하루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가는 것도 처음은 아닌 듯이 보였다. 젊은 할머니 앞에 비슷한 연배 혹은 조금은 더 젊어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슬쩍 한마디 던져 보신다.
“할머니, 거 임산부 배려석이에요.”
“….”
“노약자석은 저 쪽에 따로 있어요.”
“….”
“노약자석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음 어쩌시겠어요…?”
“일어나라 해야지…노약자도 아닌 젊은 것들이 어디 노약자석에 앉아 갈라고…”
“할머니도 임산부 아니시잖아요…”
“내가 젊었을 때는 이런 거는 있지도 않았어…어디 여자가 임신한 걸가지고 생색을 내…그리고 다들 애 낳고도 일주일만 지나면 다 일도 하러 가고 했는데…임신한게 무슨 벼슬이라고…”
임산부 배려석이나 노약자석이나 모두 사회적 약자 혹은 육체적 약자를 위한 존중과 배려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이가 먹었다고, 임신을 했다고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이기에 그 자리들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준 것이다. 오래 전부터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강조해온 유교적 문화에서는 노인에 대한 공경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다. 공자(孔子)로부터 시작된 유교적 문화는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을 지향했다. 그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을 군자라 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을 소인이라 칭하였다. 물론 유교적 문화의 많은 폐단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군자의 도리를 지키고 소인의 행동을 피하는 것은 아직까지 사회적, 도덕적 공감대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적 사상의 기본적인 도리로서 노약자석과 임산부 배려석은 동일한 선상에서 고려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노약자석이 우선이고, 임산부 배려석은 무시되거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약자가 노인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임산부 역시 약자에 포함되지만, 노약자석에 앉으면 너무 심한 눈치를 봐야 했기에 굳이 임산부 배려석을 별도로 설치한 것일 뿐이다. 약 2천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피난을 가는 길에도 노약자와 여성을 우선시 했으며, 유교적 사상과는 전혀 별개인 서양에서도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여성과 노약자를 우선적으로 구명정에 오르게 하였다. 이는 수천 년을, 전세계적으로 이어져온 가장 합리적인 정의라 할 수도 있다. 피난을 가는 와중에 임산부가 노인들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었으며,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와중에 임산부 대신 내가 먼저 구명정에 오르겠다는 노인들도 없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배려를 당연한 권리라 생각을 하기도 한다.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배려는 그들의 권리도 아니고, 그들은 그러한 배려에 감사해야 하며, 그들 역시 그러한 배려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 이미 충분한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지위를 누림으로써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만약 그러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당시의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기여를 했을 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노력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오히려 그 당시에는 적어도 노력한 만큼의 보상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기성세대에서는 아직도 젊은 세대에게 너희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로 시대의 구조적 한계를 편협한 경험적 사고에 기반하여 젊은 세대에게 많은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또 다른 좌절의 벽을 세우고 있다. 밤을 세우며 일을 했고, 원치 않는 가족과의 이별을 감수하며 해외에 파견을 나가기도 했지만, 그 보상은 적어도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고, 아이들을 꾸역꾸역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과정이 쉬웠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은 그 이상의 노력을 한다해도, 집 한 채 마련하는 것이 꿈만 같은 일이 되었으며, 아무리 졸라매어도 아이 하나 낳아 기르기조차 막막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한탄일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도 노약자와 임산부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의 성숙도를 의미하는 것뿐 아니라, 이러한 배려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이들 역시 군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누구나 빼곡한 지하철에 힘들게 버티고 서서 가는 것보다는 자리에 앉아 편하게 가는 것을 선호한다. 다만, 그것을 참고 양보하는 것에 대한 성숙한 군자의 도리를 이해하고 지키고자 하기에 사회적 배려에 대한 합의에 동참하는 것이지, 그러한 배려를 강요하고 당연시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한 적은 없다.
예전에는 노약자석에 대한 양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이슈들이 종종 제기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적 성숙도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거의 사라진 듯 하다. 오히려, 약자로 분류가 되어야 하는 유아, 몸이 불편한 분들이나 임산부 등이 노약자석을 이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단지 시각적 판단에 의존해서 누군가를 편협한 기준에 따라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사회적 합의에 동참하지 못하는 뒤쳐진 부류에서 주로 행해진다. 임산부 배려석을 굳이 노약자석에서 분리해낸 이유 역시 외형적으로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들의 어려움을 말 그대로 배려해 주기 위해서이고, 오랫동안 그러한 배려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현란할 정도의 핑크색으로 도배를 했음에도 아직까지 잘 지켜지지 않고 있음이 더욱 아쉽기만 할 뿐이다. 일부 경험과 연륜으로 포장된 지적, 도덕적 수준이 미달된, 사회적 배려를 가장 우선적으로 받고, 또 누리고 있는 이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배려를 훼방 놓고 있음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몇 년 전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출근길에 지하철 타는 것을 무척이나 곤혹스러워 했었다. 입덧이 너무 심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생강젤리, 생강차 등을 입에 달고 있었으며, 손목에 차는 입덧 방지 제품들도 수없이 이용해 봤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기는 어려웠다. 당시에 임산부 배려석이 생긴다는 말에 잠시나마 기대를 했지만, 실제 이용하기는 영화 쿨러닝에서 자메이카 국가대표팀이 봅슬레이에서 우승하듯이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시에서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개선책과 홍보를 지속해 나가고 있고, 서울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최근에 부산에서는 사물인터넷 기술을 활용하여 임산부에게 작은 비콘(블루투스 근거리 무선통신장치)을 배포하고, 임산부가 지하철에 탑승하면 지하철에 핑크라이트가 켜지는 캠페인도 진행 중이다. 몇 년 전에 보건소에서 커다란 임산부 목걸이 같은 것을 배포하던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말 그대로의 배려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핑계는 ‘몰랐다’, ‘안보였다’ 로 수렴된다. 조금 더 뻔뻔하게는 '안볼란다'도 있다. 그렇기에 임산부 배려석을 조금 더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으로 아주 조그마한 불편을 감수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한 불편함을 임산부라면 당당하게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임산부가 아니라면 주변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잠시라도 멈칫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임산부 배려석은 시각적으로 차별화를 해 놓았지만, 행동의 제한을 가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긴 좌석의 한 쪽 끝에 위치한 임산부 배려석에 작은 여닫이 문과 같은 작은 팻말을 설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이 여닫이를 앞으로 제쳐서 굳이 만원 지하철내의 주변 사람들까지 조금은 불편하게 만들어야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의 불편함과 주변 사람들에까지 불편함을 가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눈에 띄이는 정도가 아닌 행동으로 연결되는 인지를 강요하는 상황임에도 자발적 의지로 임산부를 배려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한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눈초리와 스스로 소인이 되는 선택을 했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 비난의 눈초리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갖추고 있으며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조차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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