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만두와 동네만두
대학원 때였다. 완벽한 학자 스타일이셨던 교수님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것이 꽤나 중요한 취미셨다. 덕분에 술만 마실 줄 알던 나도 서울의 오래된 노포들을 다니며 다양하고도 깊이있는 음식의 맛을 깨닫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참 술 좋아할 대학원생이였을 때라, 참 많이도 마시고 다녔다. 그렇게 새벽 늦게까지 마셔대고, 몇시간 자지도 못하고 실험실에 나오면, 축농증으로 10년 넘게 고생한 사람일지라도 내 몸 전신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술냄새를 맡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해도, 간에서 더이상은 해독을 하지 못하겠으니,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리는 것처럼 온몸 구석구석 퍼져 있는 알코올의 향은, 더구나 술은 좋아하지 않으셨고, 가벼운 감기조차 걸리지 않은 교수님의 후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여지없이 점심때 실험실로 배달온 피자를 먹어야만 했다. 그렇게 피자로의 해장이 익숙해져 갈 무렵, 여느 날처럼 알코올의 기운이 어깨 너머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을 무렵, 피자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교수님이 나가서 점심을 먹고 오자고 하셨다. 어딘지도 알려주지 않으시고,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장충동에 있는 한 평양냉면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7,8년 전이어서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께서 소주 한병을 옆에 놓고 아주 천천히 냉면 한그릇에 만두 한 접시를 놓고 식사를 하고 계셨었다. 멋모르고 따라가 물냉면 두개와 만두 한 접시를 시켜놓고, 피자가 아닌 국물이 있는 해장을 한다는 설렘과 낯섦의 사이에 어쩡정하게 머물고 있을 무렵, 음식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오장동의 함흥냉면과 깃대봉냉면이나 유천칡냉면과 같이 머리가 깨질듯이 쨍한 얼음 육수에 자극적인 매운 소스맛으로 냉면을 먹던 나에게 거의 투명하게 보이는 육수와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마지못해 부여잡은 스텐인레스 그릇을 통해 느껴지는 미적지근함은 그 동안의 나의 냉면에 대한 나름의 지식을 부정하기엔 충분했다. 거기에 실제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을 통째로 들고 국물을 입안으로 들이 부었음에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해장의 신호와 예상을 뛰어넘는 밍밍함은 차라리 피자를 먹을 걸 이라는 후회까지 도달했었다. 한 젓가락 집어든 면발은 세련보다는 투박에 가까웠고, 힘 매가리 없이 툭툭 끊어지는 면발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거기에 내 반응을 보시며 당연할꺼란 듯한 표정과 함께 적어도 3번은 먹어봐야 평양냉면의 진짜 맛을 이해할꺼라며, 한번 맛을 보면 다른 냉면은 못 먹고 평양냉면만 찾게 될 거라는 교수님의 말씀은 평소에는 전혀 느껴볼 수 없는 신뢰도가 바닥을 뚫고 들어간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게 했다. 물론 지금은 그때 그 말씀이 너무나 옳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냉면에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실망을 다하고, 다른 곳을 눈을 돌리고자 하니, 투박하기로는 냉면 면발을 뛰어넘어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듯한 비주얼의 주먹만한 만두 몇 개가 약간은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냉면이야 워낙 상식을 뛰어넘는다지만, 만두야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으로 앞접시에 옮겨온 아직은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만두에 간장을 살짝 올려 숟가락으로 한쪽 구석을 도톰하게 잘라 한 입 넣은 순간, 이 집은 냉면과 만두가 참 잘 어울리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만두를 이리 투박하게 모양내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만두소를 이리 심심하게 만들어내기는 더 어려웠겠구나 싶었다. 냉면과의 조화를 생각했겠지만, 어느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맛은 아직 내 입맛은 젊구나라는 생각과 어른들의 입맛은 참으로 묘하다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흐르고, 간에서 해독하는 알코올의 양이 늘어가는 속도만큼 내 입맛은 빠르게 노화가 왔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서울 시내의 온갖 평양냉면집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어느덧 혼자서 냉면 한그릇에 제육 반접시와 소주 한병을 크게 눈치보지 않고 시켜 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다른 많은 평양냉면집을 다녀보며, 비록 이집의 만두처럼 투박스러운 외형을 가지고 있는 만두는 종종 만나보았지만, 재료 그 자체의 맛이 심심한듯 직선적으로 와 닿는 만두는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분명 평양냉면의 맛은 감히 조금씩 느껴가고 있다고 혼자서만 생각하고 있지만, 이 만두는 아직까지 스스로를 어리다고 느끼게 하는 몇 안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사실 만두를 굳이 찾아다니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만두 맛에 대해 객관적인 기준이나 평가를 감히 내세울만한 깜냥도 안 되거니와 전혀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할만한 경험과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다. 다만, 추억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필요도 없거니와 누군가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하는 절차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만두와 관련된 몇 가지 추억들은 가지고 있다.
만두와 관련된 추억 중 가장 어렸을 적의 추억은 아마 초등학교때 였던 듯 하다. 당시 아빠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계셨다. 일에 몰두하시던 아빠가 전화를 안받는 일이 잦은 편이시라, 저녁시간 무렵에 아빠에게 전화를 한번 해보고 안받으시면, 으레 나는 아빠의 사무실로 가서 아빠를 모시고 와야 했다. 아빠의 사무실은 시흥대로 길가에 있는 건물의 3층인가 4층에 있었다. 집에서 아빠의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는 아주 커다란, 주말마다 새마을 청소를 하러 가야하는, 그리고 항상 가면 적어도 친구 한 두명은 만날 수 있는 놀이터도 있었고, 엄마의 흰머리를 뽑거나 짧은 안마를 해준 후에 받을 수 있는 50원짜리 동전을 넣고 할 수 있는 그 당시의 최첨단 오락실도 있었다. 하지만, 놀이터와 오락실보다도 나를 더 유혹하고 흔들리게 했던 것은 아빠 사무실과 같은 건물 1층의 건물 입구 바로 옆에 위치한 만두가게에서 올라오는 하얀 수증기였다. 정확히 무엇을 파는 집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로변의 보도블럭을 어느 정도 잠식한 매대 위에는 아이 주먹만한 만두들이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꽈배기 같은 것들도 있었던 듯 하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포자 형태의 만두였다. 피는 찐빵처럼 두껍거나 하얗지는 않았고, 약간은 투명해 보이기도 하고, 부추같은 것이 언뜻언뜻 비쳐보이기도 했다. 아빠와 집에 가는 길에 종종 사가기도 했는데, 여지없지 밥차려 놨는데, 만두 사왔다는 잔소리를 듣기 일수였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맛이었다. 표면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고, 약간은 거칠은 듯 하지만, 포슬포슬한 피의 느낌은 얇은 찐빵의 그것과도 같았다. 속은 당면이나 두부가 들어가지 않아, 고기의 맛이 도드라졌고, 고기만 먹지 말라고 부추도 듬뿍 넣어준 듯 적절한 부추의 씹는 맛도 나쁘지 않았다. 짜다 싱겁다라는 느낌 대신에, 굳이 간장을 찍지 않아도 충분했고, 종종 느껴지는 작은 생강의 씹힘과 향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게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덕에 밥을 먹고도 만두 한줄을 다 먹을 수 있었던 듯도 하다.
지금도 종종 그 앞으로 지나다니지만,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만두집은 사라졌고,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건 30년은 충분히 넘은 만두집 옆의 약국뿐이다. 이제 아빠도 안계시고, 내가 아빠가 되었지만, 아직도 돌아다니다 종종 옛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그 당시와 비슷한 비주얼의 포자 만두를 파는 곳을 만나면 내심 반가운 마음이 앞서고, 아이들에게 만두를 사다주고 싶은 마음과 여지없을 잔소리 사이에 잠시간의 고민을 하곤 한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사진이 없는 음식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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