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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Oct 23. 2021

적토성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2015. 8. 20)

積土成山 風雨興焉

순자의 권학 편에 나오는 글귀로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그곳에서 바람이 일고 비가 내린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흔히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과 같이 소소하고 작은 일부터 근면 성실하게 실천하면 언젠가는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자기 직분에 충실하라는 평범한 경구라고 생각해 왔던 이 문구가 내게 조금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 남다르게 다가오게 된 계기는 얼마 전 방송을 통해서였다.  

최근 '생각의 집'이라는 방송으로 유명해진 건명원의 원장,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의 이야기다. 이 분이 자신의 삶은 요행과 행운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한 학생이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의 삶이 우연의 연속이라면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일이 모두 부질없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교수님은 앞의 경구를 인용하셨다. 풍우흥언은, 다시 말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은 우연한 일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기상이변은 인간이 예측하기도, 대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바람과 비가 몰려온 것은 산이 있었고 그 안에 계곡이나 구릉이나 절벽과 같은 것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흙을 한 줌 한 줌 쌓아 산을 이루더라도 그곳에서 비바람이 일어나는 것은 내 의지와 뜻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흙을 쌓는 일조차 실행하지 않는다면 비바람이 일어날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룬 사회적 성취나 성공이 남들이 보기엔 요행이나 행운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음지에서 흙 한 줌씩을 쌓아가는 지난하고 무미건조한 작업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했다. 그분의 현재 위치는 그렇게 요행과 행운처럼 보이지만 적토성산의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설령 적토성산하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화려하고 명예로운 지위는 허락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의 벼락출세에도 반드시 적토성산의 공덕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진인사 대천명"과 유사한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망각한 채 내게 태양이 비추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스스로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소명을 이행했다고 해서 그 대가가 당연히 돌아오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도 부질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적토성산'만 남는다. 흙을 쌓으면 산은 만들어진다. 그 산에서 신묘한 비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랄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내가 쌓은 산이 동네 이름 없는 돌산일 수도 있고, 일만 이천봉이 솟아오른 금강산일 수도 있다. 그렇게 유명하여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접고 그저 묵묵히 흙을 쌓아가라는 말이다. 한 분야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지겨운 고행의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을 이겨낸 이에게 쨍하고 해 뜰 날이 오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범위 밖의 일이다.

뻔히 힘들고 쉽지 않은 일을 앞둔 이라면, 내가 이 고생을 사서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는 상황에 처한 이라면, 꼭 한 번쯤 되짚어 볼 말이다. 김훈 선생의 '밥벌이의 지겨움'처럼 꾸역꾸역 밥을 버는 것은 도리 없는 일이다. 편하고 보장된 삶에 안주하는 것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걷어차는 일이다.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숨을 거둔다. 그 이후의 생명활동에는 아무런 향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가꾸지 않는 이를 말한다. 가꾸지 않는 순간 우리의 몸은 흉해진다. 흉한 몰골을 아끼고 측은히 여길 사람은 돌아가신 테레사 수녀님 뿐이다. 얼굴을, 몸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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