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4(2013. 5. 7)
옷은 사람만 입는다. 간혹 사람보다 절절하고 애틋한 반려동물에게 입히기도 하지만, 옷은 누가 뭐래도 인간의 고유한 발명품이다. 옷은 몸을 보호하고 몸의 특정부위를 가리며 몸의 생리적 현상에 적절히 대응하여 인간의 신진대사를 돕기도 하지만 대체로 몸을 더 빛나게 하는 일에 쓰인다.
그래서 의류산업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해마다 트렌드를 선도하여 뒤쳐지는 무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해 준다. 그렇게 옷은 지위와 신분, 혹은 귀천을 가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제 옷의 기능성에는 미적 기준이 내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심미성이 그 기능의 전부 인지도 모른다. 개성의 표현을 달리 말해 신분사회로의 회귀본능 내지는 향수라고 한다면 비약이겠지만 그런 용도로 이해하는 이들도 꽤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먼 과거의 일이지만 옷의 가치를 오로지 몸을 가리기 위한 도구로써만 활용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공식적으로는 두 명 남짓 기거하는 학교 앞 자취방에 살고 있었는데 정작 들락거리는 유동인구를 제외하고도 꽤 정기적으로 숙박을 해결하는 이들만 족히 열은 되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그 집의 주인이 누군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고 비키니 옷장(?)이나 기다란 옷걸이 거치대에는 늘 정체 모를 옷들이 걸려 있거나 혹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저 먼저 걸치고 나가면 그날의 주인이 되는, 나눔과 공유의 삶을 몸소 실천하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 무소유의 무위자연인(?)이라고 할 것이다.
오래전이지만 몇 가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 옷 무더기 중에, 전날 밤 국빈관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하고 온 현철이나 태진아 선생님의 의상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옷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옷들이 하룻밤씩 없어졌다가 나타나는 현상이 종종 발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20여 년 전 어느 무명의 트로트 가수와 한 이불을 덮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공생형(혹은 공멸형?) 공동체의 명실상부한 호스트였던 그 선배는 찌는듯한 여름날, 학생들이 드문 방학기간을 노려 급기야 속옷 차림으로 교내를 활보하는 기행을 벌이고야 말았다.
당시에는, 속칭 '러닝셔츠와 빤쭈'로 대변되는 흰색 남자 속옷의 전형을 깨고 파격적으로 등장한 형형색색의 소위 박스 트렁크가 대유행이었다. 아마도 개그맨 주병진이 본격적으로 언더웨어 시장에 도전했던, 바야흐로 속옷패션의 시대였던 그 시절, 남태평양의 휴양지에나 어울릴 무늬의 트렁크 패션을 자랑스럽게 반바지라고 우겼던 그날의 그 선배는, 유일하게 에어컨이 작동하는 학교 전산실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진 채 망중한을 즐기다가 뜻밖에 나타난 여자 후배에게 덜미를 잡히고야 말았다.
'형, 그 옷 아무래도 속옷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는 후배들을 상대로 거의 우격다짐에 가까운 억지를 부리던 선배에게, 평소 당돌하기로 유명했던 나의 동기 여학우가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울 아빠 빤쭈랑 똑같아요... 선배' 잠시 얼굴을 붉히던 그 선배는 모기만 한 소리로 비참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안쓰러운 항변을 일갈했다. '안에 팬티를 입었으니 이게 겉옷이지 어찌 속옷이겠니…' 당당함이 사라진 선배는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갖은 기행과 보편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행적으로 동문들 사이에 회자되었던 그 선배는 며칠 전 마흔셋이라는 꽃 같은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롭고 고달픈 벤처 창업의 길을 우직하게 걸었던 선배는 동문들과 술 한잔을 한 뒤 종적을 감추었고 며칠 째 연락이 닿지 않아 지방에 계신 가족들이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에서 휴대폰 위치추적 끝에 허름한 고시원 원룸에서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인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였고 고독한 돌연사로 종결되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았으나 일을 핑계로 빈소를 지키지 못했던 나는 수목장을 치르고 나서 동기가 보내준 쓸쓸한 비문이 담긴 사진을 보고는 목이 메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에 마침 JK김동욱이 부른 '찔레꽃'을 듣고 있어서 유난히 울컥한 감상이 더했는지는 모르나, 출신 고교, 대학, 다니던 직장 이렇게 달랑 세줄의 이력이 옮겨진 비문은 반짝거리는 대리석 표면이 무색할 정도로 단출하고 메말라 보였다.
외롭고 황량한 망자의 길에 조금의 위로라도 될까 하여 못난 후배가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