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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n 01. 2023

A Serious Man

Be a good boy

나는 코엔형제의 영화를 1984년작 '블러드심플'부터 2018년작 '카우보이의 노래'까지 18편을 전부 보았고 그 전편을 모두 좋아하는 광팬이다.(그 이후에 형제가 각각 단독으로 만든 영화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 '시리어스맨'을 최고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족히 다섯 번은 보았던 이 영화를 어제와 오늘에 걸쳐 여섯 번째로 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인사이드 르윈'을 가장 좋아하지만 심난한 일이 많은 요즘에는 '시리어스맨'이 계속 생각나서 다시 찾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내게 최고의 영화가 될 것 같다.


간략히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미국의 유태인 사회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중산층인 주인공은 영년직(테뉴어) 심사를 앞둔 전도유망한 물리학 교수이면서 두 아이의 아빠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다. 그런데 그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아내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홀아비와 바람이 났는데 남편에게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외국인 학생이 학점거래를 요구하며 몰래 건넨 돈봉투를 돌려주지 못했는데 영년직 심사위원회에 계속 익명의 투서가 들어가고 있으며, 백수인 남동생이 얹혀 사는데 도박과 매춘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린다. 마초기질이 다분한 이웃집 백인남자는 그의 땅을 침범하여 창고를 지으려 해서 법적인 분쟁에 휘말리려 한다.


골치 아픈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은 유대교 랍비를 찾아 조언을 구하지만 그들의 선문답은 그를 더 혼란스럽게만 한다. 영화가 시작될 때 올라오는 자막 한 줄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잘 말해준다.


"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Rashi라는 유대교 랍비가 했다는 이 말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냥 단순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시련이 찾아오면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신이 내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 시련을 주신 것이고 그 시련을 꿋꿋이 이겨내면 나에게 굉장한 축복(?)이 내릴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희로애락'의 무엇과 관계된 것이건 그냥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사건이 굳이 나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고 꼭 나에게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다. 주인공인 물리학 교수의 강의에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 복잡한 물리 이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으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에서 만나는 두 번째 랍비가 해주는 '이교도의 이빨' 이야기(이교도의 이빨에 새겨진 히브리어 문구를 발견하고 그 뜻을 알고자 괴로워하던 유태인 치과의사가 그 문구를 무시해 버리고서야 평정심을 되찾았다는...)에서도 앞의 자막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지지해 준다.


나는 우울증, 불안(공황) 장애 그리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아들을 위해 휴직을 했지만, 아이는 아직 학교에 복귀하지 못했고, 복교를 위한 위드 위센터의 일시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데 매주 조퇴와 결석을 반복하다가 이번주에는 단 하루도 출석하지 못하고 있다. 휴직한 직장에서는 인사이동과 과도한 업무강도로 날마다 곡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며(내가 과연 내년에 복직할 수 있을까?), 아내는 여전히 아들의 증상에 대처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아내 대신에 내가 휴직한 이유다.) 아파트 옆동에 사시는 어머니는 노환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요양원에 들어가실 날만 기다리시지만,(괜찮은 요양원은 대기만 1년이 넘게 걸린다.) 여전히 아쉬울 때마다 우리 집 전화는 불이 난다.


영화의 주인공이 지금의 나보다 형편이 나은지 아닌지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려고 이 영화를 찾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시련이 더 창대한 미래를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착각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역시 다시 보길 잘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 글을 쓴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골치 아픈 두 아이(딸-아들 남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나는 영화 속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았지만 단 한 장면에서만큼은 배꼽을 잡아 버리고 말았다.


이웃집 남자와의 영토분쟁(?) 때문에 친구인 변호사를 찾은 주인공은 아내와의 재산분쟁까지 더해져서 변호사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비서를 통해 급한 일이라며 아들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영화의 배경이 1960년대이니 핸드폰은 없다.)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 "아빠, TV가 안 나와. 옥상에 올라가서 안테나 좀 만져봐..." 중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주인공의 딸과 아들(196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의)은 21세기 대한민국의 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랍비는 모두 3명인데 주인공이 마지막에 만나려 하던 랍비는 연로하여 면담을 거부한다. 그 마지막 랍비(영화 속에서는 가장 현명하다고 칭송받는)가 성년식을 맞은 주인공의 아들을 만나서 남기는 말이 영화의 마지막 메시지다. 나는 이 영화를 여섯 차례나 보면서 항상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자막에만 꽂혀 있었는데 오늘의 감상은 달랐다. 마르샥이라고 하는 아흔이 넘어 보이는 랍비가 성년식을 무사히 마친 주인공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까?"


이 순간 잠시 나는 숨을 죽였다. 이 장면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내가 놓쳤던 엄청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랍비는 질문을 하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당시의 유명한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멤버 이름을 하나씩 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 초반에 유태인학교에서 주인공의 아들이 수업 중에 선생님에게 빼앗겼던 라디오를 돌려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Be a good boy!"


아뿔싸, 이 순간 내가 정말 중요한 메시지를 놓쳤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영화는 두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살면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에 대해 집착하지 말고 무심하게 받아들이라는 인트로의 자막은 마지막 랍비가 주인공의 아들에게 한 말과 연결되어 있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건... 그래도 착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모든 희망이 사라지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왜 착하게 살아야 할까? 내게 이런 터무니없이 억울하고 분한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나에게 이런 엄청난 시련을 주는가라고 한탄하는 주인공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하게 살아야 할까?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이 나에게 묵직하게 들려온 이유는 하나다. 그럼 어떡하겠는가? 억울하고 분하다고 해서 세상을 향해 혹은 신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내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특별한 이유가 없듯이 내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에도 이유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다. 태어났으니 착하게 사는 일...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고 남의 물건에 욕심내지 않고 내 형편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내가 착해야 하는 이유는 내 슬픈 현실에 내 가족이 묶여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뿐이다.


* Image from “A Serious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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