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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May 30. 2024

즐거운 상상

낙천, 긍정의 힘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타고나길 그랬던 데다가 자라면서 그런 성향이 더 공고해졌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나처럼 세상을 부정해 버리는 사람이 흔하진 않다. 소박하게 살면서도 사회의 불공정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으며 밝게 사는 이들도 많다. 나는 천성적으로 그런 긍정의 인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들은 분명히 멍청해서 저런 거야. 자신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니 저렇게 즐거울 수 있는 거지. 참 한심할 노릇이야.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나와는 기질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으로 여겼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들이 받는 부당한 처우가 합당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얄궂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 오십을 넘기며 나는 이제야 철이 들었다. 내가 멸시하던 그들이 진정코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에 의해 혹은 사회 시스템에 의해 초래된 부당하고 불합리한 처사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건 당연한 도리다. 그걸 외면하고 지나치는 게 잠시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선 안된다. 하지만 그런 부당함에 대한 분노로 삶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어리석은 건 없다.


나는 언젠가부터 매일매일 화가 나 있었다. 차 안에서, 회사에서, 집에서 심지어 TV에 이상한 드라마나 뉴스보도를 접할 때에도 끝없이 화만 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쳐버렸다. 화를 내는 것처럼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도 없다. 이렇게 분출한 에너지는 회복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지쳐있었다. 그 책임이 세상 탓이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부당함에 저항하는 건 인간의 도리지만 세상의 모든 부당함에 분노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화를 내다가 지쳐버렸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오십을 넘기며 내게 닥친 시련은 나의 분노를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나는 지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티를 내면 안 되었다. 그래서 또 분노가 치솟았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야만 했다.


얼마 전 '오십에 읽는 주역'이라는 책을 읽고서 세 단어를 휴대폰 배경화면에 새겨 넣었다. '낙천(樂天)', '유부(有孚)', '유심(維心)'... 낙천은 하늘의 운명을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이라는 뜻이었고, 유부는 그 운명의 끝에 남겨진 내 시련의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심은 매 순간에 그 믿음에 의지하여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이 놀라운 긍정의 힘만이 지친 나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지금 한없이 어둡다면 곧 동이 틀 것이다. 그 막연한 믿음에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를 부정할 만큼 나는 지혜롭지 못하다. 따라서 옛 성현이 해 놓은 이야기를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엊그제 퇴근길에 딸아이를 태우고 광화문을 지나던 때였다. 앞의 차들이 하나, 둘 차선을 변경하더니 내 앞에는 붉은색 고깔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왜 차선을 차단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도 서둘러 옆차선으로 옮겨갔다. 그때 옆차선 뒤편에서 따라오던 관광버스가 나를 향해 경적을 울려댄 것 같지만 차간 거리가 충분하였고 깜빡이를 켜고 여유 있게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그 경적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신호대기로 정차 중이었을 때 내 우측 차선에 정차한 관광버스의 기사는 연신 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는데 딸아이가 아무래도 우리를 향한 욕설인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관광버스에 살짝 뒤처져 정차하였기 때문에 버스기사와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위치였는데, 기사는 나를 향해 조금 더 앞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손짓에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가운데 손가락으로 양손을 뻗으며 내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화가 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가 두렵지도 않았다. 그가 버스를 운전하는 게 아니었다면 나의 차를 따라와 보복운전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우회전을 해야 했다. 버스가 우회전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학생이동차량"


아마도 경복궁으로 견학을 나온 중고생들이 타고 있었을 그 버스의 기사는 차량 내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내게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우습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 큰 대학생 딸 앞에서 불쾌한 욕을 직접 듣지 않았으니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딸아이도 좁은 창틈으로 연신 손가락 욕을 날리는 기사의 행동에 웃음을 지었다. 너무 없어 보인다고 했다.


분한 버스기사가 혼자서 흥분했을 생각을 하니 조금 통쾌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밀리지도 않은 퇴근시간에 그는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우스꽝스러운 손가락질은 나에게 별다른 불쾌감을 선사하지 못했다. 이것이 긍정의 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욕을 먹었지만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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