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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Jun 27. 2024

자연스럽다는 착각

슬픈 이유

새벽 일찍 눈을 떠 등교하는 아이를 챙기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런데 출근준비를 하는 내내 그리고 운전하는 내내 나는 가라앉아 있었다. 쉰을 넘긴 나이에 이런 감정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난 별 감흥 없이 이른 출근을 했고 남은 시간을 때우러 구내식당에 갔다. 하지만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내내 아니 라면을 먹는 내내 나는 가라앉은 기분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갱년기 증상은 익히 경험하고 있기에 오늘처럼 유난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가라앉은 내 감정의 실체가 왠지 낯설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슬픔이었다. 우울함이나 무력감은 종종 경험했는데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픈 감정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이른 아침에 일상의 무게에 짓눌린 가장이 슬픔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계기가 있어야 했다. 주변의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있거나 하는... 작년 3월 휴직을 결심하기 직전까지 나는 일주일 내내 사무실에서 숨죽여 울었다. 우울증으로 신체마비를 겪는 아들을 집에 홀로 남겨놓고 나온 부모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나는 응급실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홀로 울부짖었고 비로소 휴직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사건이 벌어진다면 무디디 무딘 50대 가장의 슬픔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내 아들은 우울증 2년 차를 넘기며 많이 좋아졌고 이제 대학입시 대신에 가죽공방에 다니며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연로하시지만 응급상황을 우려할 만큼의 건강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 아침 나는 슬프다. 우울하거나 무력한 게 아니라 가슴 깊은 곳이 슬며시 아리다.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남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든 탓인지 사연 많은 드라마에도 쉽게 감정이입이 되곤 했지만 오늘의 감각과는 달랐다.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누구라도 명확히 진단 내릴 수 없겠지만 이 또한 갱년기 증상일지 모른다. 삶에 대한 집착이나 의지가 사라지고 나면 우울하고 무기력해지기만 하는 게 아닌 거다. 슬프기도 했던 거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이 무의미하고 허무해지니 이젠 슬퍼지려는 단계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결론 내릴 것이다. 나이 들면 그런 거야...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는 거야. 늙어가는 거야... 젊을 땐 모르는 일이 자꾸 생기는 거야...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늙는 건 자연스럽다. 60대에 미인대회에 나가는 할머니(?)는 부자연스럽다. 세월의 힘을 덜 받는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변해 가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여기까지는 진실이었다. 그런데 오늘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삶이 자연스러운 것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이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절대진리인가 말이다. 우리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걸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순리에 역행하는 삶이 많은 말썽과 충돌을 일으킨다. 심지어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이치,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오늘 나의 슬픔은 그 자연의 이치 때문이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 절대 선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 없이 인용하는 '바람직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자연의 이치는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힘이지만 그 힘에 굴복하는 삶이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어제저녁, 할머니와 꼭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머니를 모셔왔다. 아파트 바로 옆동에 사시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분을 힘겹게 부축하여 왔는데 저녁 밥상에서 입안에 가득 머금은 상추쌈 하나를 삼키지 못해 뱉어내야 했던 내 어머니는 여든일곱에 한쪽 다리를 거의 못쓰신다.


어릴 적 학교폭력의 트라우마로 불안장애가 찾아온 아들은 학교 수업을 듣지 못해 친구가 없다. 그래도 사람이 그리워 친할머니, 외할머니, 이모할머니, 큰아빠들을 찾다가 온라인 올드카 동호회에 가입해 40대 아저씨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여전히 혼자 있는 오후시간을 감당하지 못해 슬픔에 잠긴다.


그런 아이를 보아온 정신적 충격 탓인지 아내는 심각한 인지능력 저하로 병원에 다닌다. 통원 6개월 만에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치료제를 처방받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이나 집안일을 챙기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그런 아내가 흘려놓은 사건사고들을 수습하느라 나는 4중고에 시달리며 아내를 구박하는 일에도 이제 지쳐버렸다.


3학년 1학기 종강에도 불구하고 교수님 공연에 참여하는 딸아이가 알바에 연습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면서도 틈틈이 심심한 동생과 놀아주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프로필 사진을 찍었고 오늘은 친구와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8월에는 독일로 연수를 가는 아이가 다음학기에는 휴학을 한다고 하니 나는 불쑥 아들의 말벗이나 되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나의 주변에 일어나는 이 모든 상황들이 오늘의 나를 슬프게 한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걷지도 못하는 엄마가 틀니 때문에 상추쌈 하나를 못 넘기는 것이 거슬렸고, 그런 할머니를 기어이 모셔온 아들의 마음이 걸렸으며, 열심히 저녁상을 차렸지만 밤늦게 돌아와 여행짐을 싸는 딸아이에게 온갖 타박을 듣는 아내가 불편하였다. 그리고 나름 청춘의 고뇌에 빠져있으면서도 가족들 분위기에 티 한번 못내는 딸아이가 밟혔다.


그 모든 것을 보고 잠든 나의 아침이 슬프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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