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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작가 Sep 15. 2024

같이 걸어 볼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전에는 이직을 위해 퇴사를 했던 상황이었기에, 지금은 퇴사보다 '그만두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둘 만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천천히 그만둘 준비를 하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후, 뭔가 완전히 끝난 것 같은 불안함. 그러면서도 뭔가 완벽히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내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밀려드는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이름 붙이기가 힘들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내 인생에서 절반쯤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스 속 흉흉한 소식들을 접할 때면 인생 절반이 아니라 거의 끝까지 다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태어난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 했으니, 비단 나뿐만 아니라 내 아이에게도 얼마만큼의 삶이 주어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조금이나마 덜 억울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생 후반전을 준비해 보기로 했다. 그러려면 지금 내 인생에 대한 중간 점검이 필요하다.



     

북한이 남침을 못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이 무서워서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내 딸은 당시 그 무섭다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내 눈엔 아직도 아이 같지만 이미 내 키를 훌쩍 넘게 큰 지 오래고, 속 깊고 착한 아이지만 엄마의 잔소리가 제일 듣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티를 팍팍 낸다. 외동딸 이어서인지 성격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욕심도 많고 야무진 편이라 지금까지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안 해봤다. 그런 딸아이도 사춘기를 겪는 중인지 가끔 혼란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 공부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으면서,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하는 건 귀찮단다. 뭐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그러면 공부에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재밌을 만한 것이 있으면 해 보라고 해도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열정과 무기력함 그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중인가 보다.

엄마보다 친구가 더 중요할 때라 그런지 친구랑 좋은 일이 있었던 날은 둥둥 떠다니는 풍선처럼 들떠 있다가, 친구랑 안 좋은 일이 있던 날은 기분이 지하 10층까지 내려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젠 엄마가 나서서 해결해 줄 수 없는 종류의 일인 듯해서, 딸아이가 내게 말하면 들어주고 안 하면 모르는 척한다. 나도 그 나이 때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그게 별거 아니었다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라, 지금은 치열하게 그 고민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 고민은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으니.

    



'그래! 딸과 함께 산티아고에 가야겠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저 언젠가 한 번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그곳에 드디어 갈 때가 된 것이다. 내가 걷는 걸음이 순례자의 숭고한 걸음은 아니겠지만, 온전히 나 자신을 돌아보며 충분한 생각을 하기에 산티아고 순례길 만한 곳은 없다고 느껴졌다. 한참 사춘기 한가운데에 있는 딸에게도 넓은 세상을 보며 마음껏 나만의 생각을 해볼 수 있으니 참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나를 따라다니며 조잘조잘 잘도 얘기하던 아이는 중학생이 된 이후로 방에서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기 일쑤라 예전만큼 대화를 많이 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런 우리 모녀에게도 서로에 대해 많은 대화를 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 아~아~아~’ 하는 장기하의 노래가 불쑥 떠오른다.

그래. 이건 내 생각이다. 생각해 보니 딸과 같이 갈 수 있는 시간은 여름방학을 이용한 한 달 정도이다. 안 그래도 덥기로 유명한 나라인데, 그것도 제일 더운 여름에 가자고 한다면? 집순이 기질이 다분한 딸이라 유유자적 관광을 하자고 해도 집 떠나는 것 자체로 싫어할 텐데, 땡볕에 걷는 길이 달가울 리 없다. 과연 아이가 그 고생길을 같이 걷겠다고 할까?

     

“유림아, 있잖아~ 여름방학 되면~ 우리 이번엔 좀 특별한 여행을 가보면 좋을 것 같아.”

     

두근두근.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최대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스~을쩍 얘기를 꺼냈다.

    

“응. 어디로 갈 건데?”

     

여행 좋아하는 엄마를 둔 탓에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 많이도 따라다녔다. 그 덕인지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려는 듯한 어투로 여행지가 어디인지를 묻는다. 좋았어. 이 분위기 그대로 밀어붙이자.

      

“이번엔 스페인이랑 포르투갈을 가 볼까 해. 산티아고 순례길 들어봤지? 포르투에서부터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코스로 하고, 그 이후에 바르셀로나에서 아빠랑 만나서 관광도 하고 오자.”

      

최대한 '바르셀로나'와 '아빠', 그리고 '관광'이란 말에 꽂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힘주어 말했고, '산티아고'와 '걸어서'라는 단어는 물 흐르듯 녹여 넣었다. 아빠도 간다고 하면 ‘이미 결정된 일이니 나도 가야겠다.’라고 생각하길 바라면서.

     

“응. 그럼,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야?”

     

잉? 의외로 쉽게 'Yes!'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렇게 쉽다고? 너 '걸어서'라는 말 못 들은 거 아니지? 듣긴 했어도 어떤 길을 얼마나,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대답한 건 분명해 보였다.

     

“엄마도 잘 몰라. 여유 있게 보름 정도 걸으면 될 것 같은데, 그 뒤에 바르셀로나에 일주일 더 있어야 하니까 넉넉히 한 달 정도 잡고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음… 여름방학을 친구들하고 놀지도 못하고 다 보내버리는 건 싫은데.”

     

그렇지. 너무 쉽게 간다고 한다 싶었다. 집순이 딸아이는 주야장천 집에 있다가, 가끔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놀 수 있는 그 귀한 여름방학이 통으로 날아갈 위기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스리슬쩍 넘어가기는 힘들게 되었다.

     

“엄마는 예전부터 꼭 한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었어. 엄마가 갱년기가 왔는지 이것저것 생각도 많아지고 우울해질 때도 있는데, 순례길을 걸으면서 그동안 엄마가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생각도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 유림이도 사춘기를 겪으면서 혼자서 힘들게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을 거야. 엄마랑 같이 가는 거지만, 어차피 혼자 걷는 길이야. 그 길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고 많은 걸 느껴보면 유림이에게도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아. 사실 엄마도 순례길은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우리… 같이 걸어 볼까?”

     

공감 능력이 뛰어난 딸에게 감정의 호소를 했고, 이 방법은 내 예상대로 통했다.

우린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고, 그중에서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걸을 수 있는 '포르투갈 길'을 택했다.


포르투 도심을 벗어나 해안길로 들어서니 포르투갈의 시원한 바다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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