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교시 휴강이라 오늘은 여유롭게 출근하겠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어젯밤부터 머리가 아프다던 딸아이는 아침에 일어나 더 아프다고 했다.
그래도 늦게 출근하는 덕분에 병원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했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병원만 데려다주면 스스로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갈 정도로 독립심이 자라 있어
그 또한 대견했다.
혹시 남편이 시간이 되면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줄 수 있나 싶어 조심스레 물었더니, 이미 얼굴에는 짜증이 스며 있었다. “못 데려다주면 택시 타고 가면 돼”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남편은 늘 자기 계획과 감정이 흐트러지면 일단 짜증부터 드러낸다.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짜증의 강도만큼은 확실히 다르다.
이럴땐 내가 자주 쓰는 문장이 생각난다
“안 그런 사람은 없어. 다만 조금 덜 그런 사람과 많이 그런 사람이 있을 뿐이야.”
아침부터 그 표정을 보고 나니 내 안에서도 화가 서서히 올라왔다.
분명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에게는 그마저도 부담이었나 보다.
15년 가까이 함께 살며 남편의 패턴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짜증으로 보이는 감정 뒤에는 ‘미안함’이 숨어 있다는 걸.
해주고 싶지만 상황이 되지 않아서, 혹은 책임감을 느끼는데 곧바로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표정이 되는 것.
이제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흔들리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어쩌면 나 역시 상대가 느낄 감정보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먼저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남편을 보며 나의 모습도 비춰 본다.
늘 부탁을 들어주는 YES휴먼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누군가의 부탁에 ‘할 수 있음’을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게 아니라,
‘못 할 때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