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단편소설입니다.
* 글의 재미와 저자 고유의 글맛을 살리기 위해 표기와 맞춤법에 예외를 둔 부분이 있습니다.
● REC (하이현)
아, 이런 건 대체 왜 하는 겁니까? 이거 때문에 이하진 엄마가 어젯밤에 전화까지 했다고요! 그 사이코 같은 여자. 바꾼 전화번호까지 알아낼 줄이야.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빡할 줄 아나.
아주 미친 여자예요. 이하진이 제정신 아닐 만도 했지, 그런 여자 밑에서 자랐으니. 그 여자가 여기 나오지 말라고 협박했어요. 나 원래 안 나오려다가 그 말 듣고 여기 나온 겁니다! 내가 여기 나오는 게 그 여자 엿 좀 먹이는 일 같아서!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겁니까? 걔네 엄마 찾아갔다는 것도 이상하고, 주아영도 만났다던데.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네.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이하진 인생에서 최악의 사람들만 골라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예, 뭐 부정은 안 합니다. 주아영이랑 바람난 것도 맞고, 정확히는 주아영이 양다리 걸친 거지만 어쨌든 나도 알면서 만났으니 뭐.
사실 나 여기 이하진 돈 받고 나온 겁니다. 오랜만에 연락 와서는 돈 궁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대뜸 500만 원이나 계좌로 보냈어요. 안 갚아도 되니 인터뷰 하나만 해달라고. 내가 그 자식한테 잘못한 것도 있고, 그래도 오랜 친구였는데 나온 겁니다.
주아영이랑 만난 건 내 평생의 가장 큰 실수였죠, 망할 기지배. 처음에 이하진이 자기 여자친구라고 소개해줬는데, 네 뭐. 예쁘기도 하고 성격도 괜찮더라고요. 그렇다고 결코 어떻게 해보려던 건 아니었고. 지금이야 이하진이랑 내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나랑 이하진은 제일 친한 친구였단 말입니다.
잘 사귀라고 축하해 줬는데 그날부터 주아영 그 기지배가 내게 연락을 한 겁니다. 이하진이 번호를 알려줬다길래 그런가 보다 했어요. 처음에는 연락 오는 것도 이하진한테 기념일 선물 뭐 하면 좋을지, 이하진이 뭘 좋아하는지 이런 거 묻길래 별 의심 없었죠.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깊은 관계가 되어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하진 핸드폰에서 몰래 제 번호를 알아낸 거였습니다. 지금이라면 그딴 뻔한 수작에 안 넘어갔을 텐데!
아무튼 제게는 계속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말했고 금방 헤어질 거라고 했어요. 이하진이 잘 다니던 의대 휴학한 거 마음에 안 든다고, 딱 부러지는 맛도 없고 연애가 늘 심심하다고. 만나서 하는 것도 없다고 했단 말입니다. 이하진이 왜 휴학했는지는 관심도 없었죠.
처음부터 이하진이 의대생이어서 만난 겁니다. 의사 사모님 소리 듣고 싶어서. 그걸 알았을 때 나도 주아영이랑 헤어졌어야 했는데 뭐에 홀린 건지, 원. 이하진이 휴학하자마자 정이 뚝떨어진 기지배가 나 같이 답도 없는 지잡대생을 계속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주아영이 하진이 자식이랑 결혼한 줄도 몰랐어요. 둘이 결혼식도 하고 세 달 정도 같이 살았다면서요? 이하진은 나한테 아무 말 안 했습니다! 그건 내가 주아영 만나는 게 스스로 찔려서 이하진의 연락을 피하기도 했으니 그렇다 쳐요. 주아영 그 기지배는 나한테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독한 기지배 같으니라고.
나는 둘이 결혼하고 헤어질 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 기지배랑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꼬박꼬박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할 거 다 하면서 지냈단 말입니다. 둘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이하진 엄마가 날 찾아왔을 때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이하진이 진작부터 우리 사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도요. 나도 억울하단 말입니다!
이하진 엄마, 그 미친 여자가 그날 찾아와서 이 얘기를 전하더니 우리 집을 다 때려 부셨어요. 어디서 깡패 새끼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서 말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랑 단 둘이 살았는데 그 충격으로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그 여자는 내게 입 함부로 놀리지 말고 행동 똑바로 하면서 살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돌아갔어요. 할머니가 쓰러진 걸 뻔히 보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입니다!
나는 정신없이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죠. 그 일을 이후로 할머니는 네 달이나 병원신세를 졌어요. 원래도 몸이 안 좋았으니까. 나이가 워낙 많기도 했고 심장에 그 뭐야, 스텐트? 뭐 그런 시술도 했거든요. 겨우 기력을 찾아 퇴원은 했는데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나 같은 새끼 때문에 험한 꼴만 보고 갔죠.
좀 정신 차리고 난 뒤에는 그 미친 여자를 신고하려고 경찰서도 가고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집 때려 부수고 내가 신고해도 먹히지 않는 게 정말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내 일이 될 줄이야. 이하진이 왜 그렇게 엄마를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죠.
그 뒤로 나는 취직도 못하고 이렇게 한량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게 그 여자랑 연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친 여자가 뭐라도 했을 것 같은 의심은 합니다. 그런데 나는 힘도 없고 빽도 없고, 이하진 그 자식한테 내가 잘한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이렇게 삽니다.
주아영? 걔네 엄마가 깽판 치고 간 뒤로 그 기지배랑도 그대로 연락 끊겼어요. 망할 기지배. 그러고 보니 나 만나면서 자기 집 한 번 알려준 적 없네, 하. 집도 몰라서 가볼 곳도 없더라고.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그래봤자 뭐 걔 인생도 망했겠죠. 이하진네 엄마가 주아영 잘 살게 절대 안 놔둘 테니까.
나는 이하진이랑 중딩 때부터 친구였어요. 이하진은 반에서 눈에 띄지 않는 그냥 조용한 자식이었죠. 취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관심 있는 것도 없어 보였죠. 그냥 공부를 잘했다는 거 말고는 딱히 특징이 없었습니다.
아! 걔 그림을 잘 그렸어요. 그러고 보니 친해진 건 이하진이 그리던 만화 때문이었네요. 언제부턴가 그 자식이 그림 그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만화 캐릭터도 잘 그렸고 스토리도 재밌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했던 게 그렇게 열심히 만화를 그려놓고 나서 다 그리면 몇몇 친구들한테만 보여주고 바로 찢어버리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엄마가 알면 안 된다고 했어요. 뭐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공부공부하던 때니까. 예체능 한다고 하면 부모들이 반대하던 건 너무 뻔한 스토리였죠. 나는 부모가 없이 커서 그마저도 부러웠지만.
아무튼 그래서 그거 그렇게 찢을 거면 나 달라고 했더니 고민하다가 나 줬어요. 한동안은 내가 걔 만화 받아서 모아뒀고. 그러면서 이하진이랑 친구가 됐습니다.
그 만화들이요? 지금은 없습니다. 나는 이사를 많이 다녀서 중간에 잃어버린 짐이 많아요. 학창 시절에 쓰던 공책 같은 거는 진작에 다 버렸죠. 밤에 도망치듯 이사한 것도 많으니.
이하진은 나랑 친해지고 나서부터 말이 많아졌어요. 그동안은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끔은 조용히 좀 하라고 꿀밤 먹인 적도 있습니다. 그럼 이해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집에서는 말 한마디 못한다고.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하더라고요. 이런 얘기했다는 것도 집에서 알면 안 된다며 비밀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나는 그냥 이 자식이 오버하네 정도로 생각했죠. 그냥 집안이 조용한 분위기인가보다 하고.
그런데 가끔씩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걔네 엄마가 좀 이상하단 느낌은 있었어요. 걔네 엄마가 바빠서 늘 시터를 붙여줬는데 시터도 이하진한테 말을 걸 때는 집 밖으로 데리고 가서 말을 걸었답니다.
알람소리도 울리면 안 된다고 항상 잠을 편히 못 잤어요. 신경을 곤두세워야 아침에 일어날 수 있다고. 집 안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라나 뭐라나.
그러면서도 더 어릴 때는 한동안 사람 목소리만 들었던 기억도 있다고 했어요. 그전까지는 아무 소리도 못 듣다가 갑자기 하루 종일 목소리가 들렸다고. 잠잘 때도 계속 들려와서 잠도 못 자고 불안해하다가 멈추라고 시터에게 말하면서부터 다시 그 목소리가 없어졌다고 했던가.
나야 뭐, 그냥 악몽 꿨는가 보다 했죠. 뭔 얘긴지도 모르겠고 그냥 집에 시터가 있다고 하길래 ‘아 이 자식 좀 사나 보네.’ 정도나 생각했습니다.
학부모 참관 수업 때 걔네 엄마를 처음 봤는데 속으로 ‘우와!’ 했어요. 수많은 엄마들 사이에서 눈에 띄어서 다들 깜짝 놀랐을걸. 혼자 포스가 달랐어요. 당당히 학교 교장을 자신의 눈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포스.
이하진이 수업 끝나고 자기 엄마한테 저를 소개해줬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고. 뭐 난 그게 익숙해서. 부모가 없으니까. 나는 그 뒤에도 그냥 이하진이랑 친하게 지냈습니다.
고딩 때부터는 학교를 같이 다니진 않아서 얼굴은 자주 못 봤습니다. 이하진은 과고를 다녔거든. 물론 연락은 종종 했고. 가끔 서로 안부 물으면서 지내다가 성인 되고 나서부터 다시 조금씩 봤습니다. 그때 주아영도 소개받았고. 의대 갔다고 해서 잘난 척하는 자식도 아니었고 중딩 때랑 똑같이 나를 대했어요.
좀 부끄럽지만 내게 돈도 잘 빌려줬어요. 나는 늘 생활이 힘들었으니까. 염치없이 하진이한테 겨우 부탁하면 언제나 돈을 빌려줬습니다. 그래서 내 계좌를 알고 있었죠. 그래서 내가 계좌도 말 안 했는데 오늘 인터뷰를 부탁하면서 돈을 넣어준 것 같습니다.
이하진이 휴학한 이유요? 나도 자세한 속내까지는 모르는데 걔네 부모님이 이혼을 한 게 결정타였던 것 같은데. 나는 이하진네 엄마가 그렇게까지 미친 여자인 줄 몰라서 평소에 걔 말을 깊게 듣진 않았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나마 그 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걔 아버지 때문이 아닌가 싶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집에 자주 없다고. 대학교수라 그랬나.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서 강의하기 때문에 주말에만 집에 온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그래도 좀 숨 쉬는 것 같다고 했었는데. 그땐 이 자식 참 유별나다 싶었는데 그 미친 여자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네.
그러고 보면 그런 여자 밑에서 어떻게 이하진 같은 순둥이가 나왔지? 친아들이 아닌가. 그나저나 이하진은 학교 다시 복학했대요? 지금은 뭐 하고 지낸답니까?
당연히 주아영 일 있고나서부터 연락할 수가 없었죠. 이하진도 원하지 않을 테고. 어떻게 사는지 누가 알려주겠습니까. 엊그저께 연락 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반가웠는데 인터뷰해달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 안 하더라고. 기회가 되면 직접 얼굴 보고 사과는 한 번 하고 싶습니다. 내 말 전해줘요.
쓴다는 책에 부디 이하진 엄마, 그 사이코 같은 여자 엿 먹일 내용이 많이 들어갔으면 좋겠네. 원하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까? 나 순댓국 한 그릇만 더 먹읍시다. 이거 음식값 그쪽이 내는 거 맞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