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단편소설입니다.
* 글의 재미와 저자 고유의 글맛을 살리기 위해 표기와 맞춤법에 예외를 둔 부분이 있습니다.
● REC (남혁민)
네, 안녕하세요. 남혁민이라고 합니다. 이하진 씨랑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아니다, 일했었죠. 하진 씨가 일주일 전에 그만뒀으니까요.
저도 퇴사하고 싶지만 당장 월급이 끊기면 다음 달 카드값도 내기 빠듯해서요. 하진 씨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아, 어린이용 동화책을 만드는 작은 규모의 출판사입니다. 저는 대리였고, 하진 씨는 사원이었죠.
하진 씨요? 네, 일 잘했습니다. 영업팀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야 하는데 어려움 없이 잘하더라고요. 기본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던데요? 점주들도 많이 만나고 가끔 편집팀 대신 작가들 백업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중소기업이다 보니 일의 구분이 명확하지가 않아요. 한 사람이 몰아서 일당백을 해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러고 싶진 않은데, 어쩔 수 없잖아요. 사장님은 최소한의 사람만으로 일이 되길 원하고 더 뽑아주진 않으니까요.
하진 씨 자리도 전임자가 그만둔 지 꽤 됐는데 사장님이 새로 뽑을 생각을 안 했죠. 부장님이 사정사정해서 겨우 공고를 낸 겁니다. 그런데 이 업계가 워낙 급여가 짠데 학력은 또 대졸을 뽑거든요. 그게 영업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죠.
거기에 출판업계 미래도 안 좋잖아요. 요새 책 누가 보나요, 다 유튜브 보지. 동화책은 더 심하죠. 요즘은 저출산 시대라 그런지 확실히 동화책 수요가 없습니다. 애들이 없으니까. 그나마 있는 애들도 한글을 떼면 책 말고 바로 영상 보기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미래가 없어서 이 업계에 지원 안 하는 요즘 사람들 저는 백 번 천 번 이해가 돼요.
저요? 저도 기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은데 경력이 좀 애매합니다. 글쎄요, 요즘 동화 만들고 싶어서 어린이 책 출판사에 들어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정말 그런 순수한 사람들은 출판사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작가가 되죠.
아무튼 지원한 사람이 하진 씨 한 명밖에 없었는데, 고졸이었죠. 대학 휴학이요? 아니요. 이력서에는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하진 씨 이력서를 제가 출력해서 사장님께 가져다 드렸거든요. 그때 슬쩍 봤습니다.
원래는 지원 조건 미달이라 사장님께 전달되지도 않을 이력서였는데 부장님이 면접이라도 보자고 사장님을 조르기에 궁금했거든요. 특이한 이력이 적혀 있더군요. 과고 졸업이랑 글쓰기 유튜버요.
부장님이 사장님과 함께 하진 씨 면접을 봤는데, 면접 끝나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쟤 물건이다!’라고. 고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셨던 사장님도 면접 보고 나서는 바로 채용하라고 흔쾌히 말씀하셨죠. 사장님이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엄청 깐깐하신 분이고 한 번 결정한 건 절대 번복하지 않는 고집불통인데 그러기에 무척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진 씨랑 친해진 이후에 슬쩍 물어봤죠. 면접을 어떻게 봤길래 윗선에서 그렇게 예뻐하는지를 물었더니 자신은 그냥 질문에 대답을 잘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사장님이 동화책이 뭐냐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동화책은 말 그대로 그냥 애들이 읽는 책이지, 뭐겠습니까. 그냥 아무거나 물어봤구나 싶었죠. 그런데 하진 씨는 거기서 ‘누구나 평생 기억하는 책’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사장님이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그 대답을 들으면서 글 쓰는 사람은 역시 다르네 했죠.
아, 글쓰기 유튜버라는 게 진짜 글을 쓰는 장면을 영상으로 올리는 거였습니다. 하루에 몇 문장씩 창작해서 손으로 직접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거였죠.
당연히 저도 봤습니다. 하진 씨가 직접 보여주던데요? 글씨체도 예쁜데 매일 조금씩 쓰는 문장들도 좋더라고요. 구독자나 조회 수가 많진 않았던 것 같지만 분명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 영상이었죠.
누가요? 하진 씨가요? 아뇨. 하진 씨는 오히려 말이 많은 편이었어요. 업무상 그럴 수밖에 없던 것도 있는데, 사적인 대화도 많았어요. 나도 무턱대고 이런 개인적인 것들을 물어보진 않죠. 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아닙니다. 하진 씨가 들어오고 나서 첫 회식이 있었습니다. 뭐,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데 결과적으로는 하진 씨랑 친해진 계기가 됐죠.
그날 하진 씨가 술에 취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계속 주절거렸습니다.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몰랐는데 아무튼 혼자 막 떠들더니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테이블을 쾅쾅 내리쳤어요. 순식간에 회식 분위기는 엉망이 됐죠.
제가 그걸 수습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납니다. 사장님의 노기 띤 얼굴, 부장님의 큰소리, 어휴. 겨우 정리하고 제가 하진 씨만 따로 데리고 나와서 둘이 한잔했죠.
이거 말해도 되나? 하진 씨가 요청해서 하는 인터뷰니까 말해도 괜찮겠죠? 그... 중학생 때부터 괴롭힘을 당했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맞는 것보다는 주로 가진 걸 뺏기는 식으로 괴롭힘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돈, 가격대가 있는 물건들, 심지어는 여자까지요. 친구 한 명이 그랬다는데 성인이 돼서까지도 집요하게 연락하고 찾아오고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그 친구 때문에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의 주변에 다른 친구들도 없었다고 했어요.
분명 처음에는 친했는데 언제부턴가 그 친구가 삐딱하게 굴더랍니다. 부모님이 없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하진 씨 어머니를 보고 나서부터 조금씩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중학교 졸업 이후에는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했는데도 틈만 나면 찾아와서 돈 달라 하면서 주변을 험악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하진 씨는 특목고를 다녔으니 주변에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만 가득했을 거 아닙니까. 그 친구가 학교 교문 앞에 찾아올 때마다 경비 아저씨가 학교 선생님이나 주변의 다른 누군가를 불러야 할 정도였다고 했죠.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은밀하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부모님한테 말했냐고 물었더니 말해본 적은 없다고 했죠. 그런데 말 안 해도 이미 알고 계실 거라는 이상한 말을 하긴 했네요.
아무튼 그 친구한테 여자친구도 빼앗긴 적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요. 여자친구도 이해가 안 된다면서 말입니다. 자신이 아는 여자친구라면 그 친구랑 바람이 나지 않았어야 하는 게 맞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친구는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 만나서 애까지 낳고 산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종종 연락이 온다고 했어요. 하진 씨한테 부탁할 것이 있다면서 자꾸 만나자고 한다던데 그것 때문에 괴롭다고 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직장동료에게 웬만해서는 안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본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사람한테 말입니다. 저는 갑자기 이런 얘기들을 털어놓기에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죠.
굳이 선을 두려는 건 아니었지만 직장 사람들이랑 가까워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주일 안 사람한테 이런 얘기들을 털어놓을까 싶고 왠지 짠했습니다. 하진 씨는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 없구나 싶었죠. 그래서 그 뒤로 친해지게 된 겁니다.
하진 씨 같은 사기 캐릭터도 고충이 있는 걸 보면 역시 신은 공평한 것 같습니다. 뭐 그래야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살아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기 캐릭터요? 하진 씨는 사기 캐릭터가 맞죠. 생긴 거 멀끔해, 글도 잘 써, 말도 잘해, 머리도 좋아. 과고 나온 거 보면 두뇌가 이과에 최적화됐을 건데 문과 소양도 갖추고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가끔 다혈질인 게 흠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사회생활하면 누구나 다 있는 거니까요.
친구라면서요? 가끔 욱하지 않나요? 일할 때는 화도 내고 불합리한 건 야무지게 얘기하고 그럽니다. 친구 앞에서는 또 다른가 봐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은 하진 씨랑 어떻게 친해졌습니까? 그 난폭한 친구 때문에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들었는데요. 아! 하진 씨 유튜브 팬이었어요? 거 봐요.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했죠? 그게 작가님이셨구나.
아참, 하진 씨 퇴사하고 여행 간다고 했는데 잘 다니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이제 자주 보긴 힘들겠죠.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회사 밖으로 나가면 아무래도 자주 보기 어려우니까요. 하진 씨가 퇴사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도 벌써 그립네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