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엄마들이 힘들어하는 시기는 돌이나 두 돌까지다. 시중에 나와있는 육아서적을 봐도 대부분 24개월 이전까지의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아마 아이의 기질과 자신의 육아스타일을 파악하는데 2년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도 그렇다. 하루 24시간씩 2년이다. 나는 아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웬만한 돌발상황쯤은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존재와 좀 떨어지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이전과는 다른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이게 됐다. 분명 지금까지는 먹고, 자고, 입히는 것만 잘하면 됐었는데. 그것들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자마자 아이의 사회생활과 적응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달라진 점은 딱 하나다. 먹고, 자고, 입히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는데, 사회생활과 적응, 서서히 확고해지는 아이의 기질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는 그 전이 더 쉬웠다. 잠 못 자고 밥 못 먹고 못 씻고 못 나가던 그때가 오히려 더 나았다.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때의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돌아가는 바람개비 같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에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돌아가는 바람개비. 바람이 불어와서 날개는 돌아가야겠는데. 바람개비는 씽씽이 아니라 낑낑대는 소리를 냈다. 바람개비는 자주 서글펐고 버거웠다.
처음으로 무너졌던 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3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선생님이 보내주신 사진 한 장. 노란색의 커다란 붕붕카 안에서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아이가 붕붕카 안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아요. 밥도 여기서 먹고 잠도 여기서 자려고 하네요. 며칠 됐어요. 아마 애착이 붕붕카와 됐나 봐요.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눈물이 없는 남편도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것'만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다. 엄마와 헤어지는 건 슬프니까. 그래도 들어가서는 잘 놀겠지.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외톨이 같은 아이의 사진을 보고 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구더기가 득실대는 불지옥 같은 뭐 그런 곳으로 떨어졌으면 했다. 그곳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저렇게 밀어 넣고 나는 뭘 하고 있었나. 자괴감이, 슬픔이 휘몰아쳤다. 그런 감정들도 그때의 내 가슴을 대변하지 못했다. 찢어진다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를 알게 됐다. 미어지는 것들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을 아주 많이 어려워했다. 나는 '어린이집 적응하는 법', '어린이집 적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 '어린이집 옮기기' 등을 달고 살았다.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다른 또래 아이들을 보며 더 초조해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적응하고 있었을 뿐인데, 엄마인 내가 아이를 '부적응자'로 찍어버렸다. 이즈음 나는 남편에게 '어린이집을 옮기면 나아질까?'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해댔다. 나는 선생님의 일반적인 코멘트, 안부와 같은 사소한 말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다행인 것은, 아이가 두 달이 지나자 어린이집에서 잘 놀아주었다는 것이다. 두 달이나 아이가 적응할 수 있게 시간을 준 것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진절머리 나는 질문을 해대는 나에게 늘 같은 말을 해주었다.
"우리가 아이를 믿어줘야지, 누가 믿어주겠어. 우리 애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좀 기다려주자."
남편이 아이에게 준 것은 시간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나는 '믿었던 어린이집', '믿었던 선생님'이었던 것에 반해 그는 주어가 '아이'였다. 그의 노력에도 나는 한 번씩 어린이집의 환경이나 선생님의 말투, 내 눈에 거슬리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 트집 잡았다. 트집은 곧 '어린이집을 옮겨야 되나'라는 질문으로 옮겨갔다. 나의 불안은 아이가 신생아 때와 비교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난폭해졌다. 아이의 사회생활인데도 불구하고 '발진이 나면 이 기저귀를 바꿔야 하나'와 같은 문제처럼 취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