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실은 말이지.. 동우가 많이 아팠다는구나..”
“동우가 아프다니요? 그럴 리가요... 그런 말 없었어요.. 그리고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엄마는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우연히 병원에서 동우를 만났다고 한다.
“동우는 심장병이 있었데.. 어렸을 때부터 그랬으니 꽤 오랜 시간 동안 투병생활을 했지.. 그동안 몇 차례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하더니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나 봐.. 오랜만에 경과를 살피러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는구나..”
엄마는 눈물을 흘리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걸 왜 이제....”
“동우는 말이야.. 네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길 바랐어.. 안 그래도 지난날 힘들어해서 겨우 희망이 생겼는데 이 사실을 알면 네가 포기할까 봐.. 네가 수술 잘 받고 건강해질 때까지 비밀로 해달라 부탁했단다. 엄마도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아픈 동우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새봄이는 눈물이 또르르 흐르더니 걷잡을 수 없이 아픔이 몰려왔다.
문득 둘이 손잡고 뛰던 날, 새봄이를 배웅해 주 던 날.. 뛰어다닐 때마다 유난히 숨이 차서 한참을 숨 고르던 동우의 모습이 떠올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그때...’
“새봄아 엄마가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많이 아프고 힘들지? 동우는 자긴 괜찮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항상 네가 많이 웃길 바랬어.”
새봄이는 더 이상 엄마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거짓말.... 그때 그렇게 환하게 웃고.. 같이 놀고 위로해 주고 그랬는데.. 아팠다고?’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퇴원을 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현실을 부정하며 며칠간 멍하니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은 병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었는데 동우는 말해주지 않고 숨겼다는 사실에 무척 밉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름 동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믿었던 만큼 쉽게 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내가 널 데리고 뛰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못되게 굴어서 그랬을까? 하.. 따뜻하게 대할걸.. 고마웠다고 말해 줄걸.’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좋아하는 마음과는 달리 퉁명스럽게 대했던 걸 후회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미움과 원망, 후회의 마음을 반복하며 한동안 힘들어하였고 부모님은 곁에서 위로해 주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언제나 함께 있어 주었다.
새봄이 또한 잊어보기 위해 아픈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과의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늦었지만 다시 새롭게 공부도 하면서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 동우와의 편지와 사진이 들어있는 추억은 미운 마음과 함께 서랍 속에 꽁꽁 숨겨두고는 한동안 열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일상에 익숙해질 때쯤 봄날의 꽃과 무성했던 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지더니 어느새 찬 바람이 부는 겨울이 찾아왔다.
약속을 잊어버리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움은 그리움이 되어 밀려 들어오고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마음을 마주하게 되어 괴로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난봄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다시 놀러 가자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펜션 예약을 위해 고민하고 있을 새봄이와 상의를 하였다.
“새봄아, 너의 생각은 어때?”
“잘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엄마의 생각은 말이야.. 그래도 우리 딸이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고 살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의미 있던 여행이었기에 다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음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
“우선 펜션에 가보고 약속한 시간까지 고민해 보다 장소로 가보든지 아니면 가족들과 보내든지 하자. 갑자기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도 갈 수가 없어 못 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엄마 아빠는 우리 딸이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우선 가볼게요. 약속한 날까지 고민해 볼게요.”
부모님의 설득으로 새봄이는 조금 용기를 내보았다.
그 녀석과 함께 있었던 나날들은 새봄이에게 자신을 찾게 해 주었던 건 사실이기에 이 정도쯤은 양보해 주기로 선심 쓰듯 했지만 사실 좋아하고 믿었던 만큼 너무나 미웠고 또 미웠지만 결국 그 미움 보다도 좋아하고 그리운 마음이 더 컸다.
시간이 흘러 다시 가는 여행길.. 따뜻했던 봄날의 꽃잎은 차가운 눈송이가 되어 흩날려 꽃길이 아닌 눈길이 되어 그런지 유난히도 쓸쓸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동네가 보이자 새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눈에 동우의 집이 들어왔다.
동우 집은 불이 꺼있었고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었는지 대문 앞 쌓인 눈에는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을 들어서고 난 후 펜션의 마당은 따뜻한 햇살과 온도를 머금었던 그때의 그곳은 기다려 주지 않고 차가운 온기만 전해졌다.
그리고 추운 날씨만큼이나 새봄이의 마음 또한 냉소해졌는지 처음 여행 왔었을 때처럼 며칠을 방에만 있었다.
가끔 창문으로 마당의 나무와 그네, 담벼락을 보고는 했지만 아무도 찾지 않아 하염없이 눈만 쌓여 있을 뿐이다.
날이 추워 야외 대신 실내에서 가족들과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선물도 받았지만 동우와의 약속은 머릿속에 맴돌았다.
‘꼭 만나자.’
그렇게 웃으며 말하던 동우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 쓸쓸함을 내 비추는 새봄이를 부모님은 멀리서 바라보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도 반나절이 지나갔고 해가 질 무렵 새봄이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담요를 몸에 두르더니 오랜만에 마당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눈과 바람이 쏴 하며 들어와 한껏 눈을 감았다 떠보니 마당은 새하얀 눈이 가득 있었다.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 보는데 뽀드득 소리를 내며 한 발짝씩 걸음을 걸으며 망설임 없이 동우와 처음 만났던 그네와 담벼락으로 향해 있었다.
샤라락 내리던 눈송이 하나가 그네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담벼락을 보는데 언제든지 동우가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마음에 억눌러왔던 감정이 툭 하고 터지더니 눈물이 날 듯 글썽거렸다.
생각하지 않으리라 하며 애써 눈물을 삼키고서는 눈이 쌓인 그네에 앉을자리를 지금의 마음과 함께 지워버리려 손으로 털고는 앉아 보았다.
그동안 키가 컸는지 닿지 않았던 발은 땅에 닿아 있었고 잠시나마 살며시 그네를 흔들어 보았다.
그때의 운치 있던 삐그덕 소리는 차가운 바람에 앙칼진 소리가 된 것 같고 하늘을 날았던 느낌은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느낌이 되었다.
바람결에 추웠는지 멈추더니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불면서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우리 딸 춥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양손에 들고 아빠가 새봄이 곁으로 왔다.
그리고 코코아 한잔을 건네주더니 눈을 치우고 새봄이 옆으로 앉는다.
“조금요.”
아빠는 한참을 말없이 코코아를 마시더니 새봄이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우리 딸 많이 힘들 텐데 이겨내주어서 고마워. 사실 오지 말까 우리도 고민했단다.”
“죄송해요.”
“우리 딸이 여행 와서 엄마 아빠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이야기해 주던 날 기억나니? 엄마 아빠는 애써 힘들다 아프다 말 못 하고 걱정시킬까 봐 밝게 웃기만 하던 네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그래도 언젠간 우리 딸이 속마음을 이야기해 주길 기다렸거든..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던 우리 딸이 여행가자하는 말에 엄마아빠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었나 싶어 몹시 기뻤단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렇게 용기를 갖게 해 준 동우가 너무 고마웠단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아빠는 동우의 일이 진심으로 많이 슬펐단다. 동우의 마음을 알기에 사실 동우를 위해 다시 데리고 오고 싶었단다..”
“......”
“약속 장소에 가야 하나 고민이 되는 거니?”
“어차피 오지 못하는 거 아는데요..”
“그런데도 고민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건 아닐까? 가면 약속을 지키긴 하겠지만 정말 그 아이가 없다는 게 확인되는 거니..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는 거니?”
“잘 모르겠어요.”
새봄이는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아빠의 말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보다 그 아이가 없다는 현실을 받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아빠는 새봄이의 표정을 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코코아 잔을 옆에 두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