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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Jan 22. 2024

용감한 아이린

눈보라에도 맞설 수 있는 단단한 용기


  밤새 눈이 왔다. 하얀 이불을 덮은 세상은 고요하지만 실시간으로 몰아치는 눈보라는 무섭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필 오늘 아이의 중요한 치과 검진이 있다. 이렇게 추운 날 버스를 타고 멀리 다녀오려니 걱정이 앞선다. 양쪽 주머니에 핫팩을 넣고, 두세 겹으로 옷을 껴 입고, 귀마개와 장갑, 목도리와 마스크로 중무장했다. 눈만 빼꼼 내민 우리는 천천히 눈 위를 걸었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은 지치지도 않고 펑펑 내린다. 오늘 하루 세상은 하얗고 아름답게 물들겠지.


  이렇게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면 떠오르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윌리엄 스타이그의 <용감한 아이린>이다. 책의 원제는 <Brave Irene>이지만 나는 한글판 제목의 ‘용감한’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보통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이야기가 많지만 이 그림책은 반대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양재사 바빈부인은 오늘 밤 공작부인이 입을 드레스를 겨우 완성했지만 몸이 아파 배달할 수 없다. 이도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 아이린은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이 가겠다고 한다. 어린 딸을 눈보라가 치는 어두운 산길을 넘게 할 수 없던 엄마는 반대하지만 아이린은 씩씩하다. 아픈 엄마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고 따뜻한 차를 준비해 둔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상자를 들고 길을 나선다. 겨우 눈을 뚫고 가보지만 야속한 바람이 드레스를 저 멀리 날려버린다. 눈더미 속에 발이 빠지고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드레스를 배달하고 따뜻한 난로에서 몸을 녹인 아이린은 사람들과 함께 무도회를 즐긴다. 다음날 아침,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린. 몸이 좋아진 엄마와 어쩐지 좀 더 어른스러워진 아이린이 서로 웃는다. 엄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한 뼘 더 자랐다는 사실을.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집안일을 하다 허리를 삐끗해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할 일이 잔뜩 쌓여 있는데 이걸 어쩌나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파스 한 장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딸은 침대에 누워 아파하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내 침착하게 자신이 약국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혼자 밖으로 나간적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집 앞에 약국이 있지만 괜찮을까. 걱정하는 나를 달래며 아이는 카드를 챙기고 용감하게 집을 나섰다. 조심해서 다녀오란 말 밖에 할 수 없던 나는 그림책 속 바빈 부인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차가운 바람에 양 볼이 빨개진 채 돌아온 아이는 중요한 일을 해냈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파스는 왜 사냐고 묻는 약사선생님에게 엄마가 다쳐서 대신 사러 왔다고 야무지게 대답했다고 한다. 파스 붙이는 걸 도와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내 옆에 앉아 책을 읽는 아이. 언제 이렇게 컸나. 조그맣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 나를 챙기고 있는 걸 보니 감격스러웠다. 용감한 나의 딸. 스스로 용기를 내서 세상 밖으로 나갈 때, 아이가 얼마나 크게 자라는지 생생히 느낀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매일 자란다. 마치 여름날 푸른색을 뽐내며 커가는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난다. 바로 옆에서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때의 기쁨이란. 나는 어제와 또 다른 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 아이를 만난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아이가 타고난 결을 지켜주는 엄마가 되자. 맘껏 세상을 탐험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를 꼭 안아주자. 그것만이 매일 자신의 세상을 넓혀가고 있는 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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