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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Mar 06. 2024

서가를 헤매는 아이

  

  도서관 구석에 앉아 글을 쓰다 한 소년을 발견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이 불안한 눈빛으로 서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 앞에 놓인 모의고사 문제지와 왼쪽의 서가를 번갈아 보며 어느 쪽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듯했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앉아 있지만 눈은 자꾸만 왼쪽으로. 엉덩이는 자꾸만 들썩거리는데 마음을 누르는 게 보여 안쓰러웠다. 서가에는 책이 바르고 단정하게 가득 꽂혀 있다. 궁금하면 어서 읽어봐 하고 말을 거는 듯하다. 왕좌의 게임, 왕들의 전쟁, 검의 폭풍, 미드나잇 선, 브레이킹 던. 제목만 봐도 문제 푸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워 보인다.

     

  학생은 결심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가로 성큼성큼 다가가 책 한 권을 빼서 촤르르 펼쳐보았다. 소년의 선택은 <왕좌의 게임>이었다. 종이 넘기는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함수, 도형, 미적분보다 판타지 소설이 더 재밌고 말고. 고민 끝에 책을 고른 학생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났다. 순간 어디선가 엄마가 다가온다. 다 풀었니?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다 풀고 읽자. 책을 제자리에 꽂아 두고 터덜터덜 다섯 발걸음을 옮기면 다시 문제지 앞이다. 축 처진 어깨를 보는 내 마음도 아팠다.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서가를 보는 학생을 향해 이번엔 아빠가 찾아온다. 자리 옮길래? 엄마 아빠 있는 곳으로? 소년은 한번 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하고 싶은 건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건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학생은 힘을 내 문제를 푼다. 나는 알고 있다. 소년은 오늘 더 이상 문제를 풀지 못할 것이다. 같은 페이지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니까. 책을 읽고픈 욕망을 억누르며 문제지를 보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서가로 향하는 슬픈 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소년은 서가와 수학 문제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나라고 학생의 엄마아빠와 다를까? 그렇지 않다. 긴 겨울방학 동안 나 역시 아이가 역사나 과학, 고전과 가까워지길 바랐다. 도서관에 올 때마다 신나게 만화책을 집어드는 딸에게 다른 책 먼저 읽으라며 잔소리한 적도 많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대체 어떤 책을 권하고 있었나. 그림책을 함께 읽던 다정한 엄마는  어디로 사라졌나. 권장 도서, 교과서 수록 도서 읽어야 한다며 아이의 읽을 자유를 뺏고 있었던 건 아닐까. 관심도 없는 책을 들이밀며 욕심부린 자신이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부디 아이가 마음껏 서가를 헤매며 길을 잃고 또 다른 길을 찾아내길 바란다. 도서관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알게 되겠지. 어떤 단어와 문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지. 어떤 인물의 이야기가, 어떤 질문과 대답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갈매기의 꿈>을 잃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열정을 배우고 <어린 왕자>를 읽으며 서로를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오래도록 곱씹었던 것처럼. 딸이 자신만의 책을 발견하고 열어보는 순간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 보려 한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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