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와 밀레
밀레의 <이삭 줍기>는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음으로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얼핏 보기에 빵집에 걸려있으면 잘 어울릴듯한 작품이다. 예전에 정말로 어느 이름 모를 빵집에 이 그림이걸려있는 걸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 작품의 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밀레의 <이삭 줍기> 에는 의외의 진실이 따로 숨어 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이삭 줍기란 농촌의 극빈층에게 부농이 베풀어주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추수가 끝난 뒤 들판에 남은 밀이삭을 주워가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이들에게 추수하고 남은 밀이삭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삭 줍기는 그마저도 늘 엄격한 관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의 고된 모습 뒤로 멀리 떨어진 곳에 말을 탄 보안관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들보다 한 알이라도 더 주워 모으려면 잠시라도 허리를 펼 여유가 없다. 그러나 하루종일 그야말로 등골이 빠지도록 이삭을 주워도 빵 한 덩이 만들 양도 되지 않았다. 온종일 고개 한 번 못 들고 밑바닥만 쳐다보는 세 여인의 처절한 빈곤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들이 등지고 선 뒤편으로는 수레가 터져나가도록 풍성한 밀단을 쌓아둔 마차가 보인다. 밀레는 처절한 빈곤과 넘치는 풍요가 잔인하리만치 가깝게 공존하는 당시 농촌의 현실을 그림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 그림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기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긴 룻의 성서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룻은 모압 출신 여인으로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이스라엘로 함께 돌아간다. 베들레헴에서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 이삭을 주워 생계를 돕다가, 나오미의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그의 도움을 받는다. 이후 보아스와 결혼한 룻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어, 헌신과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혁명 이후 19세기 미술사에서 꼭 살펴봐야 할 화가 밀레, 프랑스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함께 농촌마을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하지만 밀레가 살던 프랑스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1848년 파리 혁명에 고무된 밀레는 초기의 초상화와 누드화를 버리고 시급한 사회문제에 눈을 돌렸다. <이삭 줍기>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 <씨 뿌리는 사람>(1850년)에서 그는 농촌의 가난한 농부들의 현실적이고도 험난한 노동 현장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당시 사회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묘사에 충격을 받기도 했으며, 농민들의 힘든 삶을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역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