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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Nov 06. 2018

[청설] '순수의 시대'를 알린 이정표

Appetizer#123 청설


올해 개봉했던 <안녕, 나의 소녀>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제목처럼, 정말 '안녕'이라 말하며 한 시대를 떠나보내야 했다. 대만 첫사랑 멜로의 전성기를 말이다. 이 장르는 너무 오래 재탕됐고, 변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시작으로 계보를 이어온 대만 멜로엔 과거 학창 시절을 향한 그리움, 찌든 마음을 정화해주는 순수한 이미지가 만드는 설렘이 있다. 하지만, <안녕, 나의 소녀>는 설렘이 증발했고, 그 자리를 교훈적인 메시지와 억지스러운 전개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개봉하는 <청설>이 반갑다. 미세 먼지를 걷어내듯, 뿌옇게 흐려진 감성을 씻겨줄 영화다. <청설>을 대만 첫사랑 영화로 묶기도 하는데, 한국에서 흥행한 대만 멜로의 설정과 겹치는 게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들과 함께 있어도 어색하지 않다. 앞서 말한 설렘과 서정적인 분위기 탓이다.


<청설>은 듣지 못하는 인물을 설정하고 그들의 사랑에 관해 말한다. 인물이 가진 장애라는 설정 외에는 급격한 변화가 있는 사건은 없는 편이며, 카메라가 천천히 인물들의 일상에 다가간다. 타임 리프, 삼각관계 등의 자극과 긴장을 일으키는 장치를 두지 않고, 인물들을 천천히 바라보게 한다.



티엔커(펑위엔), 양양(진의함), 샤오펑(천옌시)의 미세한 표정과 감정 변화, 그리고 그들의 갈등과 관계를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레 영화에 스며든다. <청설>엔 악인이 없으며, 영화 속의 착한 인물들을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굵직한 사건과 자극이 있는 이야기를 원한다면, <청설>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이 영화는 순수의 시간 안에 쌓은 이야기로, 이런 감성을 원하는 이들에게만 문이 열리는 영화다 .


다소 심심한 영화에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데엔, 배우들의 매력이 큰 몫을 한다. 앞서, <청설>은 인물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는데, 티엔커와 양양은 관찰 일지를 쓰고 싶을 정도로 독특하고 천진난만하다. 이들은 이미지부터 순수와 아름다움을 잔뜩 흘리고 있어, 청순 만화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는 온전히 그들의 얼굴과 표정에서 오는 것으로, 글로는 더 이상의 표현이 어렵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그 소녀(천옌시)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대만 멜로 영화의 팬들에겐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다.



대만 멜로 영화의 정서적 뿌리가 <청설>에 있다. 주제와 연출 면에서는 더 많은 것을 해낸 측면도 있다. 티엔커와 양양의 언어를 초월한 소통과 양양과 샤오펑이 보여준 자매간의 배려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과거의 추억이라는 장치 등을 쓰지 않고서, 인물을 천천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간질간질한 설렘을 느끼게 한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더 담백한 맛을 냈다고나 할까. 이렇게 <청설>은 대만 영화사에 ‘순수의 시절’을 알린 하나의 이정표로, 오래 기억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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