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머릿속이 복잡했다. 특정한 순간, 머릿속이 노리끼리한 색깔로 태워지면서 어지러운 신호가 떨어졌고, 숨이 조여 왔다. 그걸 넘어서면,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그걸 넘어서면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어떤 증상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을 의심했다.
"야, 심근경색은 심장이 쥐어짜듯 아픈 거고, 뇌졸중은 머리가 깨지듯 아픈 거야. 그런 병 아니니까, 병원부터 가봐."
대학병원 내과 교수로 있는 영석이 전화에 대고 한 말이었다. 영석의 말에 따라 대학병원에서 뇌 사진을 찍었고, 애처럼 보이는 젊은 여의사는 혈관이 너무 깨끗하고 건강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석증과 신경증을 의심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눈동자의 움직임을 살펴본 의사는 그런 종류도 아니라고 말했다.
"일시적인 어지럼증이 올 수도 있어요, 원인을 밝힐 수 없는 경우가 많구요, 곧 사라지는 경우도 많아요."
혹시 모르니, 그런 증상이 나타날 때, 위급하다고 생각될 때면 혀밑에 넣어 녹여 먹으라는 알약을 처방해 주었다. 쥐눈이 콩보다 작은 뇌혈관 확장제였다.
인천대교를 넘어올 때였다. 다리 중간을 지나 허공을 뚫고 어딘가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리 위에는 달리는 차도 드물었고, 멀리 해안가의 빌딩들이 보일 때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도로를 따라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핸들을 잡고 있던 때였다. 머릿속에서 뭔가 핑 도는 느낌이 왔고, 올 것이 또 왔구나, 하는 다급한 생각이 들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의사가 말한 약통을 꺼내, 혀밑에 믿어 넣었다.
지금 내 몸의 상태와 대교의 길고 높은 다리 위에 정차하고 있는 차의 상태는 둘 다 위태로웠다. 어떤 때가 되면 멈추어 서야 하는 차량처럼, 내 몸도 지금 어딘가에 멈추어 서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눈을 감은 머릿속 안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정신과를 찾아갔다.
"공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한 칠 십 프로 정도는 공황증세고, 나머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인 거지, 실제로 기절하진 않으니까 마음에 부담을 줄이셔도 좋습니다. 스트레스예요. 몸에 면역체계가 있는 것처럼 우리 정신에도 일종의 면역체계, 우린 방어제계라고 하는데 그런 게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게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정신과에서도 같은 약을 처방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상담을 해보자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왔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지 싶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태로운 마음을 들게 하는 위기감을 주는 몸의 증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으니까.
주변을 정리했고, 집을 팔았다. 그리고 도시의 외곽에 사무실을 하나 얻었다. 책과 책상, 식탁, 기본 조리도구와 식기를 챙겨 들고 이사했다. 병을 핑계로 학교는 휴직을 연장했고, 그렇게 1년을 더 나는 혼자 있게 되었다.
짐을 정리하면서, 정혜의 물건들이 나왔다. 여러 권에 걸친 낙서와 메모들이 있었다.
'생활을 버릴 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사람이 날 사랑한다곤 하지만, 난 이미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다. 아니, 버림받은 것 같다.'
'어떻게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난 그러지 못해, 선택은 더 좋은 것과 덜 좋은 것 사이에 있을 법한 문제지만, 사랑에 어떻게 경중이 있을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그 사람에게로 갔다. 내가 그에게로 자꾸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그를 일방적으로 원하기 때문에?'
'금요일이 기다려진다.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는 내 삶을 채워주지 못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들이 또박또박 정혜의 글씨체로 페이지에 눌러 쓰여 있었다. 나는 다시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꺼내 물고, 스토리를 구상했다. 정혜의 남자, 그건 놀랍게도 한 명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중간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버린다는 건 상처를 주는 일이다. 그가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내게로 왔다. 글라디올러스 꽃다발과 함께 온 그는 선물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만난 기록인 듯했다. 그리고 날짜가 기록된 메모를 중심으로 사건을 수습해 보았다. 그렇게 내가 쓰는 이야기는 정혜의 에피소드가 시간 순서로 정리되어 나갔다. 병원에서 시작된 엽기적인 행각들이 주체할 수 없는 여러 도착적인 행위들로 나타난다는 발상이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다. 한 명의 남자가 요구하는 도착적 경험들을 따라가며 결국 정혜 자신의 욕망은 내재화되고 그런 욕망들이 욕구로 변질되면서 그런 자신의 숨겨진 본능을 발견해 나가는 스토리를 구상했다. 그리고 다음 남자가 나타났고, 그리고 그다음 남자들을 겪으며 정혜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구분할 수 있는 여자가 되어 갔다. 그것은 마치 생활과 이상을 구분하며 조절해 나가는, 이성 위에 존재하는 실존을 체험하는 주체를 인식하는 것과 같았다. 이성과 감성을 철저히 이격 시키며 각기 다른 장면에서 실현되는 삶의 모습에 나타나는 현격한 차이를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을 자신이 감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결국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인 셈이었다.
그렇게 남편을 둔 여자가,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면서, 남편의 삶도 함께 노출시켰다. 정혜가 모르는 철호의 모습을 등장시켜 부부가 서로를 지우고 각자가 자신만의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따로 공유하고 있는 삶 속에서 만나는 다른 이성들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쪽으로 서술했다.
정혜는 J로, 나는 철호의 C로 이니셜 삼았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이름 첫 자를 차용해서 붙였다. 그렇게 해야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시간의 통사뿐 아니라, 공간의 공시의 축으로도 불러내야 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자의 반응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J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J의 남자들이 마치 불나방들 같아요.'
이런 댓글 속에서 눈에 띄는 댓글 하나가 따라왔다.
'작가님, 잘 읽고 있어요.'
'잘 보고 가요'
'아슬아슬하게 잘 끊으시네요. 작가님!'
이렇게 시작된 댓글들이 하나의 아이디로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J 못지않게 C의 편력도 눈여겨 볼 만하네요.'
이러다가, 내면을 통찰하는 댓글도 달려왔다.
'J와 C는 정말 서로의 연인들에 대해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일탈을 일삼았다면 대박!'
'알았다는 데 한 표!'
SUNNY라는 아이디를 쓰는 독자는, 혜연이었다. 평소 그녀가 사용하는 별명이자 인터넷 대명이었다. 혜연이 댓글로 정혜의 스토리를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분명히 혜연이라고 생각한 데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를, S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