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는 혼인신고를 하면서 미국 이름으로 바꿀까 고민 했지만 한국 이름을 그대로 고수했었다. 은행, 자동차 법원 신청서 등 이것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 넘겼던 개명작업을 영주권 신청을 할 땐 부르기 좋도록 신디로 바꿨다.
"신분 세탁에 이름 바꾸는 것 만큼 확실한 게 없어."
정혜 자신, 새로 탄생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지난 날의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인이 된다는 것, 그건 새 캐릭터를 만들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만큼의 열정으로 덤벼들었다. 신용카드에서부터 여권까지 모든 신분 관련 물리적 도구들의 이름을 일일이 전화 혹은 방문을 통해 해결해야했다. 다니엘이 알려준 메뉴얼대로 리스트에서 하나씩 지워나가며 해결했고, 옆에서 다니엘이 포인트 마다 등장해서 해결해 주는 노력을 아까지 않았다. 나이 40이 넘어서 남의 도움을 받고 그렇게 고마워 하긴 처음이었고, 그만큼 정혜는 다니엘에 대한 신뢰가 커져갔다.
하고 많은 미국 이름들 중에 신디라는 이름은, 정혜가 어렸을 때부터 신디 로퍼의 팬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돈나의 파괴력보다 신디의 불량소녀 이미지가 정혜는 더 끌렸다. 1주, 2주 단계별로 이름들이 달라진 서류와 카드가 도착하자 정혜의 공식적인 이름은 신디 킴 허가 되어 있었다. 찜찜하게도 전남편의 철호의 성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커다란 시스템 앞에서 어쩔 수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안고 가야할 짐으로, 어디 깊숙한 곳에 넣어둘수도 없는 문패처럼 정혜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다음으로 전개된 서류정리는 영주권 신청이었다. 결혼 증명, 재정보증, 이혼경력을 증명하는 이혼확인서 영주권자가 되는 과정에 필요한 서류가 많았다. 철호와 이혼한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과정이 까다로웠고, 30분간 진행된 이민국에서의 인터뷰는 화기애애했지만 긴장감에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다니엘이 옆에서 유머를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응대해 주어 따로 인터뷰 당할 위기를 모면하기까지 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위장 결혼이 아닌가 하는데 초점이 맞춰진듯했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이민국직원의 안내 중에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영주권신청을 다시 해야한다고 했다. 정혜는 왜 내가 뭘 잘못 말했냐고 반문했지만, 원래 과정이 그렇게 진행되며 21개월이 되는 시점에 다시 신청하면 그 때 영주할 수있는 정식영주권이 주어지며 지금은 조건부 영주권을 위한 인터뷰라는 것이다.
생활의 변화를 위해 하나씩 진행되어 나가는 절차들이 정혜의 마음 속 깊이 고마움으로 가득 차게 했다. 다니엘과 함께 할 수 있는 이런 저런 생활의 과정들이, 한국에서 철호와 문제가 발생한 이후 겪었던 고통을 보상받는 듯 했다. 그런 생활들이 주는 안정들로 정혜는 다니엘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합일감이 들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특히, 조만간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생활을 찾아갈 걸 생각하면 그들이 언제 어른이 되었나 싶을 정도로 대견스럽기도 하고, 정혜 자신이 아이들을 그렇게 잘 키워 냈다는 자긍심마저 느끼며 얼굴에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그런 미소는 다니엘을 쳐다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를 통해 느끼는 활력은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생활에 단단히 뿌리 박고 사는 가진 자의 여유와 자신감으로 정혜는 이것을 환희 혹은 기쁨의 충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안정 속에 정혜는 미국 간호사 시험 엔클렉스(NCLEX)에 합격했다. 시험문제를 읽어내야 하는 영어 울렁증을 극복했고, 이미 알고 있던 간호 보건 전문 용어들을 복습했다. 다니엘이 옆에 붙어 앉아 매일 한시간씩 봐줬고, 그리고 스스로 한시간씩 복습하고 예습한 결과였다. 주어진 5시간의 시험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에이전시 없이 다니엘이 병원을 알아봐준다고 했고, 신분변경은 이미 해놨던 터라 정식 병원에 채용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신, 애기 갖고 싶어?"
정혜는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말했다. 아직 둘만의 신혼을 즐기는 때라고 생각했다.
"왜? 내가 그런 것처럼 보여?"
"응, 그냥 당신 보면 당신 아들 하나 쯤은 낳아주고 싶은 생각이 드네. 그래야 내가 당신에게 보상하는 일이 될 거 같아."
"제 정신이야? 당신 나이가 몇인데? 곧 50이야."
"그러니까, 50되기 전에 낳았으면 해서."
"뭐? 단단히 제 정신이 아니야. 애 낳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당신 닮은 내 자식을 갖고 싶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임신계획은 사소한 말다툼으로 비화되었다가 정혜의 말 한마디로 정리되어 버렸다.
"여기 당신 아기가 이미 있어, 바보야!"
다니엘은 정혜의 손에 잡혀 그녀의 배위에 올려진 손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정혜는 미소지으며 다니엘을 올려다 보았다.
"거짓말이지? 나 놀리려고?"
"우리 애들 쳐다보는 당신 눈을 보면서면서, 당신은 얼마나 쓸쓸할까, 눈물이 나더라."
다니엘이 상체를 일으켜 정혜의 배위로 얼굴을 갖다 대고 엎드렸다.
"이제 3개월이야. 멘스가 없어서 오늘 아침에 해봤어. 우리도 참 대책없다 그치?"
"웃음이 나와? 대책없는 사람이야."
"얼마나 좋았으면 이렇게 됐나만 생각해. 모든 탄생은 쾌락의 결과야, 절대 가벼운 게 아니란 말이지. 익스트림 엑스타시 플레져! 그건 존재의 무게와 같은 무게야."
"다 집어치워, 그냥 사랑할 거야, 당신, 영원히!"
다이엘은 신디의 배위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부볐다. 정혜의 머릿속에는 벌써 출산과 관련한 육아 이런 문제에서 부터, 병원 채용이후 직장에 나갈 일 들에 대해 생각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해낼 수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애 둘을 낳았던 20대의 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니엘의 아이를 낳아주고 싶었고, 그녀와 다니엘의 행복을 완벽하게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날 때부터 시민권자가 될 미국인 아이가 기대되기도 했다. 미국인 아이, 정혜의 자식 중에 뼈속 깊이까지 미국인인 아이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정혜가 다니엘과 함께 신혼 임신으로 흥분하며 들떠 있는 사이, 철호는 소설 쓰는 일에 매달렸다. 써나갈수록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 재미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스캔들을 그려내는 일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도 인간이 스스로 감추고 꺼내 놓기를 꺼리는 부분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이야기한다는 점이 후련하기도 했지만, 내면의 어떤 부분을 흥분시켜 놓기도 했다. 그건 비밀을 불특정한 누군가와 공유하면서 뭔가 부정한 짓을 서로 나눈다는 데서 오는 쾌감같은 것이었다. 왜 이런 본질적인 내면의 모습을 숨겨야 하는지, 도덕적 사회적 관념을 적용하더라도 현실은 너무도 성에 억압적이었다. 성억압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면서, 동시에 남성에게는 폭력의 굴레를 덮씌우는 일이었다. 남녀에게 가혹하게 적용된 금기와도 같은 관계를 풀어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하지만 자칫 잘 못 나갔다간, 현실에서 매도 당해 영원히 이런 고리타분한 시스템에서 퇴출될 수도 있었다. 마광수가 그랬고, 장정일이 그랬다. 별 것도 아닌 필화로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문단에서 사라졌다. 군사정권시절에 있었던 염재만의 반노 사건은 외설필화사건 1호로 기록될 만큼 이 나라는 적나라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철호는 그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제 소수의 성문제도 일반화의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대가 되었지만, 단 한번도 한국사회는 성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다수간의 성은 더더욱 그런 멸시와 배격을 받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다자간 성행위는 일상이 된지 오래였고, 인간의 기본 성생활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었다. 다만 동시냐, 시간차냐를 두고 논리가 갈리지만, 이제 동시에도 가능한 시대라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이건 머리와 몸의 문제였다. 이해는 되지만 실행할 수 없는, 부조화한 현실 속에 몸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철호는 정혜, J를 통해 그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연장 휴직에 들어간 철호는 짐을 줄이고 사무실로 들어와 버렸다. 오피스텔과 아파트를 정리하고, 아이들 앞으로 만불씩 송금했다. 처음부터 대출이 많았던 부동산들이었고, 정혜가 전세금을 통 채, 다 가지고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정산하고 나니 통장에 그게 1억 5천이었다. 그 돈마저 아버지 병원비와 상 치르는 비용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돈으로 새 차를 한 대 뽑았다. 사무실 전세금과 통장 잔고가 1억이었다. 차 한 대, 산기슭에 흐름한 단층짜리 사무실 한 채, 그것이 동산 부동산의 전부였다. 그래서 소설을 써서 그게 돈이 되어 생활비라도 된다면 더 없이 좋을 일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 재미를 얼마나 줄지 기대하는 바도 실제로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미리 알면 안 될까요?"
새벽에 받은 MD의 문자에 바로 답을 보냈다. 시간차 없이 바로 응답이 올라왔다.
"사적인 일로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음... 사적인 일이요?"
"작가님의 글과 관련한 일이라,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미팅을 요청 드립니다."
"글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요?"
"뭐 잘 못됐다는 그런 교정에 관련된 일은 아니고요, 순전히 개인적인 말씀을..."
"그럼, 계약과 관계없다는 말씀이죠?"
"예, 절대 회사와 관련이 없는 사적인 부탁 말씀을 드리려고요. 이런 일을 회사에서도 알면 안 되고요."
"이런 일이라... 뭔지 더 궁금해지네요."
"죄송합니다, 늦은 시간인데..."
"시간은 뭐 상관 없어요. 언제 시간이 나나요? 전 종일 사무실에 있는 몸이라 언제든 가능합니다만, 자는 시간만 빼고..."
"혹시..."
"..."
"만나 뵙고 말씀드릴게요."
잔뜩 구미만 당겨놓고 물러났다. 철호는 말투로 보아, 젊은 애같고, 여자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철호는 혜연과 헤어지고, 다시 부동산 실장이나 스탠드바의 사장과 연결해 볼까 싶었지만,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은 왠지 그사람에게 구질스럽게 질척대는 것만 같아서 싫었다. 새벽 3시에 톡을 보낼 정도면 뭔가 다급한 일이거나, 매너가 아주 없는 사람이거나 둘중 하나 일 것 같았다.
약속을 잡았다. 그 쪽에서 괜찮다는 날짜와 시간으로 정했고, 장소는 내 사무실이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왔고, 그런 장소라면 '모텔 아니면, 내 사무실'이라는 애드립에 그는 사무실을 선택했던 것이다. 누군지도 모를 애에게 별 짓을 다 한다는 감도 들었지만 그렇게 말해줘야 자기 작품을 관리하는 MD의 수준에 맞추는 일이 될거라는 판단에서 던져본 장난이었다.
화이트 노이즈가 바이털 신호처럼 뇌에 안정감을 주는 새벽이었다. 철호는 궁리와 계획, 미래와 현실 사이를 오갔다.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을 읽는 독자와 관련한 생각, 그 중에 혜연도 있었고, 어떤 익명의 존재들이 다수 들어와 있었다. 그들이 작은 금액으로 후원을 남기기도 했다. 그 중에는 진심으로 이야기의 내용, J가 벌이는 파격적인 성행위에 깊이 빠져든 독자들도 있었다.
"어머!"
이런 짧은 탄성을 지르고 사라지는 독자들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감탄사 한마디가 철호의 상상을 더 자극했고, 자신이 쓰고 있는 상황을 설정하고 묘사하는 데 더 큰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적어도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설정과 묘사가 틀리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혔다. 설렘과 흥분, 혈관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철호의 에너지를 끌어 올렸다.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와 이루어지는 은밀한 소통이었다.
새벽, 자신이 두드리는 키보드 자판 소리를 들으며 한 남자가 책상 스탠드 불빛 아래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다. 같은 시간, 침실에 달린 욕실에서 또 다른 한 남자가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 한 여자는 아직 불러오지 않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나른하게 행복에 겨운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다. 그들의 시간은 같았으나, 그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 같은 공간에서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그건 시공의 분리,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의 문제였다. 동시에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시공의 분리가 삶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이 다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마주쳤을 때 다가올 세상이 극락이 될지 아수라의 지옥이 될지 그것은 시간에 관련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