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지나치던 과일가게 앞에 50이 안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헐렁한 복장으로 섰다. 수박통을 툭툭 치는 그의 검지와 중지가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수박들도 삼복 더위에 길다랗고 둥그런 얼굴을 들이밀며 진열대 한가운데로 빡빡하게 줄을 섰다.
폭염에 수박값이 천정부지다. 초여름 7, 8천원하던 수박값이 만원을 넘어가더니 5천원 단위로 뛰어서 지금은 물금 3만 5천원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귀하신 몸이다. 그걸 살까말까 고민하듯 남자가 수박의 머리통을 퉁기고 서 있었던 것이다.
남자를 스치면서, 나 자신 입때까지 수박을 사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나는 왜 수박을 사본 적이 없을까, 오래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과일에 비해 무거워서 들고 가기 힘든 것이다. 원체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하는 성미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단순하다. 그런데 여름철마다 수박을 많이 먹은 기억이 난다. 그 많던 수박들은 누가 다 사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범인은 어머니다. 아버지의 손은 나처럼 늘 빈손이었으니,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이 아니면 어깨, 팔에 허리에 신고를 겪으면서도 그렇게 큰 통을 이고 지고 올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었다.
혼자 들고 오기도 힘들어 선뜻 사려는 마음이 서지 않는 수박을 도대체 어머니는 무슨 마음으로 샀을까? 왜 그렇게 큰 수박을 힘에 부치면서까지 먼 거리를 날라온 것일까.
수박은 덩치가 커서 한 명이 들 수 없는 겨운 크기도 있지만, 혼자 먹기에도 역시 벅찬 사이즈다. 다른 과일들은 한 번에 여러 알을 사서 하나 깎아 먹고, 남은 것들은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에 또 깎아 먹을 수 있지만, 수박은 몇 쪽을 먹으려고 한 통을 사기엔 비효율적인 사이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혼자 해치우기에 적합하지 않단 얘기다.
그럼, 수박을 사는 목적을 알겠다. 모두 함께 먹기 위해서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수박통을 퉁긴 이유도 이제 분명해진다.
-먹고 싶긴 한데, 이 걸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을까?
남자는 혼자 산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머리통을 퉁겨보는 건 익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다. 반대로, 이랬을 수도 있다.
-이게 정말 잘 익었을까? 마누라한테 욕이나 먹지 않을까? 또 쓸데없이 돈을 함부로, 값이나 내리면 좀 사오지 어찌 그리 세상 물정을 모르냐… 이런 잔소리 듣지 않을까.
이건 남자의 단순한 사고의 범위를 넘어선다. 생각은 한다 하더라도 귀막고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영향권이다. 남자에겐 그저 혼자먹기에 적합한지 용도와 기능, 쓸모에 대한 것 뿐이다. 안 그랬으면 그가 왜 그렇게 유독 한놈의 머리통만 계속 두들기며 섰겠는가?
맞다, 그는 독거남이고, 수박은 함께 나눠먹기 위해 사는 과일이기 때문에 목하 고민에 빠진 것이다. 수박은 가족 과일인 것, 그래서 그는 망설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박만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모든 과일들의 구입 목적은 함께 먹기 위한 쪽에 가깝다. 그래서 과일은 혼자 사는 남자가 고를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닌 게 된다.
과일을 사는 동기 중에, 물론 나도 갈증이 나서 해갈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그 바탕에는 온 식구가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상상이 개입한다. 그래서 과일은 나의 갈증이 너의 갈증이 되고, 나와 너의 갈증이 우리 모두의 것으로 갈증화되면서 함께 먹고 함께 자는 기초생활을 체득해서는 운명공동체로 거듭나게 해 주는 것이다.
입대하고 처음 맞는 철원의 한여름이었다. 태양이 철사를 달궈 녹일만한 땡볕에 완전군장을 들쳐 메고 행군을 나갔다. 행렬이 출발하고 한 시간 여가 자나자 철모를 제껴쓴 땅딸한 선임하사가 눈깔을 희번득거리며 M16 개머리판으로 병사들의 철모를 내리찍어댔다. 철모 안에서는 박격포탄이 터지는 것같은 굉음이 울렸으리라.
그렇게 두 시간, 세 시간을 행군했다. 왜 그렇게 줄을 섰는지 모르겠는데, 내 앞에 아무도 없이 나는 행렬의 맨 앞에 서서 걷고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뻗어나간 길의 오른 쪽은 언덕이고 왼 쪽은 비탈로 밭이었다. 밭 가운데 가건물 같은 농막이 서있고, 그 앞에 트럭이 보였다. 사람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게 걸어가면서 멀치감치서 보였다.
행군은 일정속도의 보폭을 유지해야 했다. 앞 병사와의 거리가 멀어도 가까워도 안 된다고 해서 앞 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걸어야 했다. 힘들다고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어 일정한 시간을 써서 오늘 저녁은 유격장에 가서 텐트를 치고 밥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모든 시간은 주어진 정도 안에서만 허용되었고, 우리 중대 역시 시간 안에 사단 유격장에 도착해야 했다. 민간인을 향해 손을 흔들 여유조차 없이 바삐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
멀리 산비탈 쪽 밭 가운데 모여섰던 몇 개의 밀짚모자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 중 몇명이 갑자기 비탈길을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앞선 자가 도망을 놓아 쫒는 자가 그를 잡기 위한 뜀박질이 시작된 듯 보였다. 비탈에 있을 처음에는 개미같이 작아보였던 사람들이 점점 행군 대열을 향해 달려 내려오면서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걷고 있던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은 까맣다 못해 까만 기름으로 칠을 한 것처럼 번들거렸고,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턱에 단 사람들이 하얗고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낸 채 한 가득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들이었다. 더 놀라웠던 일은 그들의 양손에는 깨진 수박이 들려있었던 것이다. 밭에서 수박 수확을 하다말고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를 낸 수박을 양손에 나눠들고 저 까마득한 산비탈에서부터 달려 내려왔던 것이다.
그들이 양팔을 벌려 손을 치켜들었고 우린 행군 속도를 유지한 채 한 손으론 어깨에 맨 총을 잡고, 또 한손으론 그들이 건네는 수박의 살을 움켜잡았다. 손에 잡히는대로 마구 입 속으로 퍼넣었다.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말이 꼭 들어 맞는 모양새였다. 걸어나가는 속도 그대로 대열을 유지한 채 모두들 한 손에 움켜쥔 수박을 입에 넣기에 바빴다.
내 평생 그렇게 갈증을 완벽하게 해소한 적은 없었다. 수박은 꼭 그렇게만 나눠 먹는 과일이렷다.
혼자 사는 사람이,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들이 몇 가지 있다. 식당에 가서 혼밥하기, 극장에 가서 혼영하기, 자기 생일에 혼축하기, 삼겹살에 소주와 함께 수박을 쪼개는 일은 더더욱 혼자하기 힘든 일이다. 어머니의 손에 들려 삼복의 더운 골목안으로 잡혀들어오던 그물 속에 든 수박의 검은 줄무늬와 육중한 그 자태는 함께하기 위한 자격이 필요해 보이는 단단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과부 마음을 과부가 안다고 했던가, 홀아비 마음 역시 홀아비가 알만한 그런 안쓰러운 찰나가 영겁처럼 길다. 지조없이 울어대는 요란한 수컷 매미소리를 뚫고 남자가 두들기는 수박통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도는 자전소리만큼이나 생활친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