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거의 모든 의미, 튤립
좀 복잡한 영화다. 이런 류의 영화를 예술영화라고 한다. 서울에 이런 예술영화만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이 몇 개 있었는데, 대학로, 명동, 이화여대 교정에 있었다. 지금도 이 영화관들이 살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관들의 장점은 사람이 없어서 아주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독의 예술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한 영화, 자칫 관객의 전통적 취향을 무시하고 만든 영화다 보니 재미없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고, 그래서 보러 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그런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각종 매체에서 소개하는 것과 같은 '우화'는 아니다. 우화라고 하면, 동식물을 비롯한 사물을 캐릭터로 등장시켜 인간 사회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풍자하는 장치가 들어가야 한다. 그런 부분은 없으니, 좀 끼워 맞추면 우의적 표현 정도가 적확한 것으로 보인다. 나타내고자 하는 본 뜻을 간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내 표현한 부분이 꿈, 영화적 요소로 표현했으니, 그러한 측면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오히려 상징적이고 은유적(allegory) 장면들로 연출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첫 화면이 영화의 장면인 점, 그걸 관객인 배우가 보고 있다는 점, 그 배우를 진짜 관객인 우리가 보고 있다는 점은 수차례에 걸쳐 현실이 변용되고 있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고, 이 건 바로 이 영화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사랑의 감정)로부터 영화관으로 돌아온 백석영이 누운 곳은 스크린 앞 무대, 스크린은 그의 환상이자 꿈이고, 동시에 거짓의 세계이다. 칼을 꺼내 스크린을 찌르고 줄 긋듯이 천천히 일자로 내리 긋는다. 스크린은 틈이 벌어지고, 찢어진 그 속으로 손을 집어 넣는다. 백석영과 아리타유리코의 성관계 장면이다.
스크린이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처럼 더 이상 허구, 환상, 꿈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백석영과 유리코는 서로가 꿈꿔왔던 허상에서 깨어나 고통 속에 절규한다. 이별.
하나의 우연이라는 사건(공중전화에서의 15분간의 만남, 초밥집에서 백석영과 만남)이 필연(사랑)을 만들고, 다시 그 필연은 아무 것도 아닌 무(이별)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것이 현실의 세계다. 손에 잡히는 실제감을 현실은 우리에게 주지만, 그 물리적 존재 자체가 다시 허상과 허구를 만들어 내고, 우연을 재생산한다. 어느 것 하나 현실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허상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건을 또 만들어 내고(백석영과 유리코의 재회) 그 사건은 우연의 장면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윤회의 굴레처럼 영원히 인간이 숙명처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구속이다.
제목 '튤립모양'이라는 것 역시 그 연장선 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를 서로 주고받는 장면에서 나오는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1500년전의 도시 공주가 다시 그 만큼의 시간이 또 흐르고 나면) 저 모양-튤립모양-을 그 때도 가지고 있을까'하는 싯구로 표현된다. 튤립모양은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우연, 필연, 사랑, 이별 등, 요리코의 카메라에 담기는 사물들의 모습) 전부를 말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은유 중 하나는, 일본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편지를 읽고 혼절하는 일본인 아내, 물구나무서기에 온 힘을 쏟는 여자아이, 무표정한 노파의 모습은 메울 수 없는 한일 간의 역사다. 이 총성 없는 전쟁의 유일한 해법, 그래서 두 인물의 우연적 사랑은 상징적 해결책이다.
표현 방식과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매우 전위적이고 주관적이다. 몽타주의 사이사이를 많이 잘라내서 연결고리가 거의 다 끊어졌다. 그걸 공주라는 공간이 메꿔주고 있는 점이 영화적 요소로 성공한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 이런 영화가 가능하구나 싶다. 감독은 관객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게 우리가 이 감독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