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것과 넘치는 것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식에 초점이 있다.
왜 캐릭터가 색색의 가발을 쓰고 나오냐, 그 색깔의 의미가 뭐냐? 극중 투자자(제작자)나 PD의 역할이 현실에서 그게 가능하냐, 등등의 의문들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이 영화의 핵심은 극중 정감독이 일갈하는 것처럼, 기존 영화제작의 틀을 파괴하고 기존에 없던 것, 새로운 영화제작 형식을 추구한 데 있으며,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은 사실과 허구, Real과 Fiction, 그 경계의 혼재와 모호함이 마구 섞여 복잡한 양상을 띤다.
실제로 허구와 사실은 구분 불가능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그것이 사실이든 허구든 중요하지 않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의 세계가 과연 진실한가? 여기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이유가 수 많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리적 현상의 결과들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수 많은 사실들은 단지 실제로 일어난 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것은 별개가 된다.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수 많은 '사실'들의 근본 원인이 어떤 하나의 진실에서 유래했다면, 혹은 그 수많은 사실들을 묶어 진실을 말하고자 했다면, 사실의 세계는 재현불가능하고, 충분조건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즉, 사실 그 자체가 진실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의 세계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자세는 교조적이고, 맹목적이어서 타의를 거부한다는 독단성(도그마)을 띨 수 있다. 그런 반면에 허구는 어떤가? 실재한 일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허구의 세계에 몰입한다. 허구에는 사실의 세계와는 다른 여러 장치가 마련되어 있고, 사실을 조작하는 기술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전통적으로) 상상력이라고 부르고, 플롯이라고 부른다.
상상력과 플롯의 목적은 진실을 조장한다는 데 있다. 일종의 미심쩍은 믿음을 유발한다는 것, 막연한 추측을 통해 그럴 것이라는 믿음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허구는 사실보다,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깝다.
이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허구성과 사실성은 그렇게 뒤섞여 있으며, 다른 창작물들이 그런 것처럼, 창작자의 경험적 사실과 희망적 허구가 섞여, 우리(관객)의 현실을 교란한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과 그녀의 예술관의 탁월함을 말할 때, 그녀가 지탄 받아 마땅한 이야기들을 평생 써 내려갔음에도, 추앙받을 이유가, 그 지탄을 이겨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허구(사실을 전제로 한, 그래서 허구와 사실의 구분이 모호한)를 통해 진실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가 영화를 소재로 삶이 가지는 순간순간의 현재성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허위, 기만성을 풍자하는 것처럼, 이 영화도 그런 주제의식을 따로 가져야 하지 않을까. 문신구감독의 여정에 빛나는 전환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