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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13. 2024

깃대, 흔들리는 깃발의 중심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경우, 그것을 없는 일로 만들만한 어떤 행동도 어떤 말도 사실, 필요 없다. 그건 마치 초상집에 가서, 할 말이 없어 몸 둘 바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경우다. 상황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 없는 무언지경의 환경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럴 때 써먹으라고, 치트키와도 같은 비상버튼을 만들어 놓지 않았나 싶다. 사이가 벌어진 틈, 그게 물리적 공간이든 무형의 시간이든 너와 나 사이의 벌어진 틈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웃음과 눈물로, 어색한 틈을 채워서 미안한 만큼의 깊이를 건너가려고 하는 것이다.

  내게도 그런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는 걸, 한국에서 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앞 4일은 상기와, 뒤 3일은 남편과 보냈다. 북한강에서 상기와 나 사이의 틈은, 강폭만큼이나 넓었다. 그가 이쪽과 저쪽을 왔다 갔다 한 시간은 4년이었고 그중2년은 다니엘과 공유한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는 감추어야 할 것들이 누구에게는 드러났다. 그래야만 유지되는 관계들이었다. 선의 안쪽과 바깥쪽의 구분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경계도 없는, 어쩌면 선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여러 관계의 복합체를 유지하면서 온갖 인공적인 수단들이 하나씩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사라져 버린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 그 다음 범주를 확보한 상기, 그리고 가장 작은 원 안에 살고 있었던 남편, 그 가장 작은 원안의 남자가 가장 큰 테두리 안에 살았던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부터,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문제가 발생했고, 내 감정과 존재를 소용돌이 치게 만들었다.

  정말 난처함과 미안함, 그걸 넘어 죄스러움에까지 이르렀고, 누군가의 앞에서 타의로 발가벗고 누워있는 마음, 들켜서는 안 되는 당사자끼리만 통용되었던 긴밀한 것들, 내가 숨겨놓은 부정을 민낯 그대로 드러내 버린 꼴, 때타고 낡아 헐어서 더러워 진 것, 추잡하게 변해버린 것, 나만 알고 있었던 일, 그 일로부터 떳떳하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숨겼어야 했던 일, 앞으로의 내 삶에서 발목을 잡을 일, 그건 엄마에게 책 산다고 거짓말하는 그런 종류의 죄가 아니었다. 너무 커서, 되돌려놓을 수 없는, 누군가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고,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 모욕감을 안겨준 행위였다. 그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마음에서부터 선을 그어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저쪽 너머의 일이었다. 그래서 흐르는 눈물은 주체할 수 없었고, 고개는 들 수 조차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자동 기계인형처럼 내 몸이 반응한 결과였다.

  어쨌든 나는 강을 건넜고, 이제 이쪽 강변에 와 있는 여자가되었다. 남편 앞에서 나는 더럽고 추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그가 내게 한 말은, '더러운 년!'이라는 말과 '아직도 넌 내 거야!'라는 말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배우자가 아닌 다른 상대와 몸을 섞는다는 건 그런 종류의 비난을 받고, 어쩌면 관계로부터 도태당하는 극단에 처해질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했을까? '몸이 멀어지면...'이라고 했던 다니엘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 다니엘의 말처럼 몸이 원했던 걸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이유에 있어 우선 순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부터 나는 남편에게 여러 번 경고를 했던 바가 있었다. 나를 놔두지 말라고도 했고, 나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런 말들을 퇴근 후 잡은 술자리에서 진지하게 전했고, 그때마다 남편은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 특히 자신이 가고 싶은 길에 대해 강조했다.


  "나는 이쪽으로 잘 가고 있어, 인정머리 없이 들리겠지만, 너도 너의 길을 가면 돼. 그러면서 우린 서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고, 그 길을 난 지금 가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 둘 다, 지금 그렇게 가고 있다고 난, 생각해."


  남편은 내게 무성의했고, 필요에 따라서만 날 찾는 사람이었다. 양말, 속옷, 구두, 식사는 물론이고, 심지어 콘돔까지 내게 물어야만 알 수 있는 사람,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당장 필요하기 때문에 찾는 것들이었다. 나도 그에게 필요한 물건쯤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벌써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후였다.

  내게도 필요한 것이 있었다. 누군가 나를 그리워하고, 내 손을 잡고 싶어서 밤마다 잠이 오지 않는 사람, 지금 당장 내게 달려오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 우연히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이 나를 닮았다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의, 사랑이 필요했다.    


  "생각해 봐, 그건 큰일이 아니야, 다른 사람과 자는 사이라고 해서 당신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공항에서부터 다니엘은 운전하는 내내 나를 걱정했다. 입국장으로 들어서면서 멀리서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나타나자, 잃었던 미소가 희미하게 살아났고 허물어진 감정을 담은 몸은 조금씩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무채색의 낡은 브래들리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곧장 집으로 갔다. 아이들은 3일 후 비행기로 올 예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스케줄을 잡은 건 다니엘이었다.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자는 그의 제안에 나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큰애는 프랑스 수학여행과 아이비리그 투어 여행도 다녀올 정도라, 이제 지네들이 비행기쯤은 스스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혼자서 비행기 수속을 밟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란 생각이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자책하고 미안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그러면 난 뭐가 돼?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든 사람밖에 더 돼?"


  다니엘의 말 만큼이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문제가 끈끈이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쪽과 저쪽의 집안 문제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애들 아빠이기도 한 자식의 문제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만은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엄마의 인생도 있다는 말이 통할까 싶긴 하지만, 아이들이 다니엘에게 보였던 태도나 감정들로 보면 새로운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게 뭘 잘못한 건 없어. 단지..."

  "단지, 뭐?"

  "날 소홀히 한 것, 날 돌보지 않았어. 그게 변명이 될까?"

  "그게 죄지 뭐야? 소홀히 한 죄, 사랑을 주지 않은 죄, 방치한 죄!"

  "그래서 다니엘이 내 남편이 되는 건 아니잖아."

  "......"


  자신만만하게 내게 반지를 내밀며 깔끔하게 관계정리를 해주었고, 더블데이트는 싫다고 말하며 나를 독점하고 싶다고 했던 다니엘이었다. 그에게도 부동산을 하는 전처가 키우고 있는 10살, 8살 먹은 아들들이 있었고, 나에게도 이제 17살, 15살이 되는 자식들이 있었다. 이런 환경을 아이들에게 안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 언제든 오케이, 댓츠 오케이, 웬에버 컴 투 미, 오어 아일 컴 투 유!"


 고마운 일이었다. 한편으론 이렇게 쉽게 결정하는 일에 믿음이 가지 않았고, 실감도 나지 않았다.


  "생각 좀 하구... 시간이 필요해."


  습기가 많았던 한국의 날씨와는 다른 사막기후의 엘에이는 밝고 건조했고, 태양이 따가웠다. 그늘만 있으면 어디든 서늘했다.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늘이 주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달아오른 얼굴을 빠르게 식혔다. 가방을 구석에 밀어놓고, 블라우스를 벗어 카우치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몸이 따끔거렸다. 인천 공항에서부터 청바지를 벗고 갈아입은 치마가 허벅지 위로 찰랑거렸다.

  다니엘이 뒤에서 나를 끌어 안았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홍차향이 내게로 넘어왔다.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 기분 그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아늑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방안의 서늘한 기운은 그의 체온이 전해지는 온기로 인해 그에게로 더 달라붙게 했다. 내 몸을 감아오는 그의 팔이 얼었다가 녹아내리는 몸처럼 내 마음을 풀어내렸다.


  "난 여기에 있고, 그는 이제 여기에 없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니엘을 거실 러그 위로 눌러 앉힌 나는 남편이 내게 했던 것처럼, 그를 몰아세웠다. 그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당겼고, 버클을 풀어젖힌 그가 윗옷을 벗어던졌다. 그는 결국 발가벗겨진 채로 바닥에 누웠다. 그의 다리 위로 올라간 나는, 그의 뺨을 때렸고, 그의 몸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다니엘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고 놀란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뺨을 맞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의 생식기를 움켜잡았다. 손바닥 가득한 그의 생식기는 이미 뜨거운 열로 화끈거렸다. 그 위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흐르는 침을 손바닥으로 훑어내 다시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네가, 내게 한 행위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이었는지, 알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조건반사였고, 나도 모르는 일탈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다니엘의 뺨을 때려버린 내 손가락 끝이 몹시 떨려왔다. 나 역시 누구의 뺨을 때려본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에 말까지 했더라면 얼마나 파괴적으로 치달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행동은 심장을 뛰게 하니까. 그 순간, 나도 알게 되었다. 남편이 그날 호텔에서 왜 말을 아꼈는지, 왜 그렇게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체위만을 강요했었는지,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남편은 그때,  나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걸, 지금 와서 알게 된 것이다.

  

  그의 몸 위에서 내 몸이 흔들린다. 풀어젖힌 머리카락이 날리면서 목이 흔들리고, 머리가 앞뒤로 꺾이며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깨를 모으고 등을 동그랗게 만다. 가슴이 출렁거리며 흔들리고, 허리가 돌아가며 흔들린다. 내 온몸이 흔들린다. 흔드는 것과 흔들리는 것만의 사이에는 어떤 인과도 없다. 오로지 흔들리게 하는 것과 흔들리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마침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기가 꺾여 넘어가는 그 순간, 내 몸의 저 안쪽 깊은 곳 어딘가에서 뭉클거리며 따뜻하고 뜨거운 어떤 것이 가슴 벅차게 밀려 올라왔다.


  흔들리는 깃발의 중심을 붙들고 있는 깃대처럼, 날아간 화살은 과녁에 명중할 뿐이다. 바람은 그저 불어올 뿐, 바람에게는 의지가 없다. 의지는 오로지 깃대만이 가진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인가… 나의 중심은 지금 어디에 꽂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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