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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14. 2024

밤, 생각

  눈을 떴을 때, 나는 누워 있었고 사방은 깜깜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눈이 없어져버린 것은 아닌지 몇번을 어둠 속에서 껌벅대며 눈을 더 크게 떠 보았다. 그렇게 볼 수 없는 뜬 눈이 되어 시간이 흘렀다. 조금씩 형체들이 시야에 잡히면서 반쯤 열린 방문 밖에서 반사된 빛이 안으로 스며들어 어렴풋해진 문틀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그 빛이 산란하여 옆에 누운 다니엘을 만들었다. 엎드려 누워있는 다니엘의 어깨라인이 생겨났고, 등을 타고 내려가면서 굴곡진 그의 엉덩이와 그걸 받치고 있는 다리에 붙은 종아리 근육이 올록볼록하게 드러났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숙취처럼 머리가 무거웠다. 나는 조용히 다니엘 옆을 빠져나와 문고리에 손을 대지 않고 문틈으로 몸을 빼내 거실로 나갔다. 갈증으로 목이 타는 듯했다. 요즘 부쩍 소갈증이 나서 물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갱년기 증상이라고 다니엘이 철분제를 가져다줬고, 그걸 꾸준히 복용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 약을 먹지 못했던 것이, 다시 이렇게 갈증과 두통을 유발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약을 찾았지만 눈뜬 소경이 어둠 속을 더듬는 꼴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오른쪽 벽에 붙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서 한 덩어리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냉장고 포켓에 물병과 와인, 두 개의 병이 보였고, 나는 그 중 와인을 꺼내 들고, 막아놓은 뚜껑을 빼내서 포켓에 던져 넣었다. 와인병을 들고, 발코니 커튼 밖의 유리문을 열었다. 새벽의 까슬한 빛과 더운 바람이 한꺼번에 확 끼쳐 들어왔다. 멀리서 울리는 경찰 사이렌 소리가 무섭게 들려왔다.


  '이놈들은 밤에 불꽃놀이를 하는 모양이야. 저 소리만 들으면 나도 뛰쳐나가고 싶어지니 말이야...'


  출동하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남편이 한 말이었다. 벌써 7년 전이었다. 처음 여기에 와서 서로 낯설었던 기억이 바로 어제처럼 다가왔다. 사이렌소리와 불꽃놀이는 아무런 연결성은 없었지만, 남편의 감각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연결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글쟁이들의 사고확장쯤으로 생각했었다.

  베란다에 선 나도, 그 때의 남편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이렌소리는 불꽃놀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오른 손바닥이 차가웠다. 들고 나온 와인병 때문이었다. 와인병 주둥이를 입에 가져가 몇 모금 그대로 꿀꺽 삼켰다. 반병쯤 남은 적포두주였다. 차가운 것이 목줄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가로 흘러내린 와인 줄기가 턱 아래로 흘러내려 가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몇 모금을 마시는 사이 마치 내 몸 위에 불꽃놀이를 한 것처럼, 붉은 물이 몸을 타고 번져 흘렀다. 나는 비로소 내가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시 거실로 들어온 나는 식탁의자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멀리서 사이렌소리가 들렸고, 아파트 사이 내리막 길은 잿빛 어둠이 내린 상태로 텅 비어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 커튼 자락을 날리게 했고, 나는 무거운 머리를 한쪽 손으로 받치고 식탁에 몸을 기댔다.

  이것이 숙취라면, 덜 분해된 아세트알데히드를 머릿속에서 밀어내는 효과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머릿속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20대 말을 그와 함께 보냈다. 그는 대학원생이었고, 나는 의료공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퇴근 후 밥, 술, 모텔을 전전했다. 그런 날들이 잦고 길어지면서 시간은 단축되어 점찍어둔 모텔에 들어 밥과 술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도 나도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뻔뻔했고 거리낌 없었다. 하루하루가 여행이었고, 신세계였다. 그를 받아들일수록 내 앞에 새롭고 휘황한 세상이 열렸다. 그가 나의 종교였고, 우상이었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너는 나의 알파요, 나는 너의 오메가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때 우린 그랬다.

  친구들처럼, 임신해서 결혼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조심할 만큼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테스트기를 사들고 모텔에 들어와 화장실문을 걸고 포장을 뜯었다. 그렇게 해서 확인한 두 줄을 둘이 들고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나도 그도 서로의 눈을 피했다. 고개 숙인 건 나였으니까, 그가 나를 내려다 봤을 지도 모르겠다.

  누가 먼저랄 것듀 없이 서둘러 결혼을 했고, 아무도 임신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상기가 알고 있었다. 상기를 떼어 놓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다른 사람의 아기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와의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5년이 흐르는 동안, 현실은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처럼 맵고 쓰렸다. 두 사람이 하나의 합으로 무엇을 맞춘다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댁에 가고, 친정에 가는 일도 역시 극도로 피곤한 일이 되어 버렸다. 사교성 없는 남편이 내 집 식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일도 그가 친정에 가길 꺼려하는 이유가 되었고, 나 또한 제사와 시댁 식구들 챙기는 일에 진력이 났던 것이다. 이래, 저래 집안의 분위기도 서로 맞지 않았다. 밝고 쾌활하고 세속적인 집안이었던 우리 집에 비해, 그의 집안은 어둡고 우울한 형이상학적 집안이기도 했다.

  그런 중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축복이었다. 젖을 먹고, 일어서고, 걸어 다니는 아이들, 그런 것들이 말을 하고,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안도와 만족감에 감흥이 가슴속으로 차올랐다. 그와 사이가 벌어질수록, 아이들에 대한 애착은 깊어갔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원어민 어학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과 내가 도망칠 궁리가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가 없는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었고, 그것은 한가닥 희망처럼 내 심장을 지배했다.

  좋았던 시절이 지나면, 보지 못했던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동안 나를 지탱했던 것이 독립해서 떨어져 나가면 숨죽이고 있던 미움이 솟아 나리니, 그것을 안은 채 사는 것은 지옥불 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모진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고, 더 덕지덕지 관계들이 얽힌 채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남는 번뇌, 그것이 내 머릿속에 파고들어 나를 온통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저 쪽 강 건너에 있을 땐 이 쪽 강이 부러웠고, 이 쪽 강에 건너온 지금은 싫든 좋든 저 쪽을 잊어야 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복잡하고 떳떳하지 못한 족보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부정한 엄마로 남겨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걸 유지하고 싶다. 심지어 남편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줬으면 싶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남편과 다니엘이 악수하고 같은 식탁에서 즐겁게 식사하는 광경을 상상한다. 여기 사람들처럼 그게 가능할까? 캐주얼하게 상대를 인정하는 쿨한 관계, '전남편이에요, 이 쪽은 지금 남편이구요' 하면서 서로의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그런 관계이고 싶다. 그게 나에게 가능할까?

  갑자기 왜, 사람들은 서로를 독점하려고 하는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친구관계에서도 연인관계에서도 모든 인간관계에서 내가 너보다 저 사람과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고 확인받고 싶은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정의 독점, 애정의 독점, 그러나 미움과 증오는? 이 건 독점이 아니라 공유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대상을 미워하고 증오해 줬으면 좋겠다는 감정의 공유, 그래서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이 감정의 최종목표다. 그러고 나면? 대상이 파멸되고 나면? 세상엔 사랑만 남을까? 사람들은 사랑만 하며 살까?

  그 사람을 나는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니엘은? 그리고 상기는? 그리고, 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니엘이 나를 흔들었을 때, 술병은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있었고, 나는 고개를 식탁에 박은 채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창밖이 훤히 밝았고, 따가운 햇볕이 발코니에 가득 내려와 있었다.


  차는 해변을 달렸다. 이쪽은 태평양과 맞닿은 거대한 해변도시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파란 바닷물이 가득한 수평선이 보였다. 이 넓고 큰 바다를 두고 이 쪽과 저쪽이 갈라졌고, 그것은 너무나 편향적으로 달랐다. 단지 강줄기 하나가 갈라놓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차이가 존재했다.


  "결국, 내 전화 한 통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어."


  다니엘의 선글라스 안쪽의 눈주름이 찡그려졌다. 그도 나로 인해 힘든 모양이었다.


  "자책하지마, 내가 할 말을 못 하고 있었으니, 어차피 잘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렇지? 우리 좋게 생각해, 그치?"

  "다시 시작하자고 했는데도?"

  "그랬어, 남편이? 정말로?"

  

  그럴 수는 없었다. 딱히 탈출구도 없었다. 다니엘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것은 도망치는 중에 뭣도 모르고 함께 도망치는 어중이 한 명을 끌어들이는 꼴과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떳떳하지도 않았고, 자랑스럽지도 않아서 나 자신이 나에게 축복하고 싶지 않은 결합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꿈 같은 인생의 설계나 행복을 보장하는 선택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됐다. 그건 스무 살 때나 하는 그런 무지한 결합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꿋꿋하게 일했고, 내 분야를 개척해서 당당히 서려고 노력했다. 이제 누구한테 의지하고, 상대에게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를 기대하는 그런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모든 불안은 어쩌면, 같은 것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불안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런 상황이 싫고, 이렇게 만든 나 자신도 싫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일상의 안식과 평화, 단지 그뿐이었다. 그런 저런 날들이 반복되었던 하루를 일없이 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 현실감이 들었고, 그걸 안 지금, 나는 그 소중한 것을 이미 잃어버린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에어컨의 찬 냉기보다 차라리 더운 바람 샤워가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깊은 속 어딘가가 사방이 가로막혀 답답해진 것을 찬 냉기로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도로는 해변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바닷가 모래사장이 보일 때면 한가하게 그 위를 거니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눈에 뜨였고, 그들 앞으로 흰 거품을 물 파도가 일렬을 지어 몰려왔다가 스러졌다. 바다로부터 멀어졌을 땐, 언덕길을 자동차가 달려 나갔다. 그 길 위로 양철로 만든 빨간 우체통을 마당 한쪽에 세워놓은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장면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집들이, 저 바다에 담긴 물들이 출렁이는 것처럼, 모두 그 자리에 있다. 조금 가까이 그걸 들여다보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사물들처럼 사라진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천년만년 그 자리에 버티고 살 수는 없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서도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며, 사람은 살고 있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붙들어야 하는 것들은 아이들, 그리고, 나의 생계, 그리고, 가족들... 그리고, 다니엘? 상기? 남편? 옛날 이승호까지? 스쳐가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이 갈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가족들 또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일 수 있었다. 그럼, 남는 것은? 나 자신 하나였다. 결국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나였고, 그런 내가 있어야 가족도 남도 있다는 분명한 사실, 코기토 에르고 숨. 여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그것이 분명한 지금 나의 실존이었다.


  내 존재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다니엘 위에서 중심을 잡고 또 잡았다. 내 생각이 흔들리지 않게 미친듯이 몸을 흔들었다. 흔들림의 끝에 어떤 고요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저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 그대로 떠내려 보내고 싶은 것들을, 몸밖으로 떨쳐내버리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다. 내 마음은 이렇게 힘든데, 내 몸은 그렇지 않았고,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어떤 지점에 있다는 부조화의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간지러운데 고통스럽다거나,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가 마치 복합감각처럼 나를 어지럽혔다. 뇌는 안정을 원했고, 몸은 흔들리고 싶어했다.

  다니엘과 함께 태평양의 해변을 따라 샌프란시스코까지 올라갔고, 라스베가스로 넘어갔다. 여러 호텔의 카지노 투어를 하며 낮 시간을 보내고, 예약한 호텔의 뷔페를 먹고, 밤이 되면 야경을 보며 거리를 걸었다. 스쳐지나는 사람들은 평온했고 행복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호텔 조식을 먹자마자 자이언캐년을 한바퀴 돌자고 했다. 거기엔 기가막힌 경치와 끝을 알수없는 터널이 있다고 했다. 터널은 바위산을 깎아 굴을 파서 길을 낸 도로였다. 검은 바윗돌을 뚫은 굴 소으로 들어가자 헤트라이트 불빛을 제외하고 모두 깜깜했다. 그렇게 한참을 구비돌아 굴밖을 벗어났을 때, 눈 앞에 펼쳐진 절경들은 붉은색 흰색이 뒤섞이며 사암절벽을 이루었고, 숲이 우거지지 않아도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바닥에 강이 흘렀다. 그 강이름은 '버진'이라고 했다.

  처녀, 한번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 때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없다. 처음이라는 마음과 시작이라는 상태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모든 것의 최초, 그것이 처녀였고, 그것은 매번 새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것은 언제든 처음이라는 사변이 마음을 깊게 울렸다. 시간을 거스르지 않아도 되었다.

  아담한 숙소에 들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풀이 마련되어 있었고, 옆으로는 말사육장이 있어 승마도 가능하다고 했다. 멀리 지평선 끝에 우리가 돌아나온 캐년의 언덕과 협곡이 보였다. 다니엘이 풀장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며 내일은 말을 타러가자고 했다. 좋은 소일거리라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풀 속에 몸을 담궜다. 다니엘이 팔을 뻗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내가 그를 뒤따라가기위해 발로 바닥을 차며 몸을 수면 위로 띄우며 팔을 뻗었다. 천천히, 풀을 가르며 앞으로 나갔고, 풀의 끝까지 간 다이엘이 벽에 기대 나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의 곁으로 헤엄쳐 갔다. 벽에 기대 나도 그의 곁에 섰다.


  "좋아."

  "좋아?"

  "응."


  나는 조금씩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편안해 진 마음 뒤편에는 돌이킬수 없다는 불가항력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나갈 창창한 시간들이 있었다. 아직도 써먹지 못한 나의 시간, 그건 나에게 늘 새로운 것을 안겨줄 것이고, 그 때마다 처음이 될, 나의 버진이었다.

  다니엘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가볍게 입술을 찾았다. 나도 그의 입술을 찾았고, 깊은 숨소리가 뺨을 타고 흘렀고 나는 그에게 입술을 열어주었다. 그는 내게 첫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물속에서 시작된 우리의 사랑은 물밖으로 올라왔고, 선탠 베드에 누운 다이엘 위로 두 다리를 벌리린 채 버텨 섰다. 석양을 등지고 선 나를 다니엘이 눈살을 찌푸리며 올려다 봤고, 나는 그의 몸위로 붉은 와인을 첨벙첨벙 소리가 나도록 부어주었다.


  "날 받아줄 거야?"


  한번도 해본 적 없는 프로포즈였다. 내가 여자로 살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가장 큰 것이었다. 남자에게 먼저 달려가지 않는 것, 그래서 당연히 남자로부터 사랑고백을 받아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전복이었다. 모든 게 이제 막 다른 쪽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축이 바뀌면서 관계도 바로 잡혀야 했다. 특히 사랑과 섹스의 중심에는 내가 서있어야 했다. 그것은 나를 드러내는 데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고, 모토였다. 그것으로 인해 내 삶은 수동과 복종, 헌신을 요구받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로 인한 질곡은 이제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다. 전복은 중심의 전환이었으며, 과히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남자의 방식을 무시하고, 내 방식을 만들었다. 몸이 하는 말, 섹스를 이끌었다. 내가 내려주는 손길 하나에 그는 웅크렸고, 내가 움직이는 허리의 율동에 따라오며 그가 숨을 삼켰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거침없이 다가갔고, 그는 뜨거운 용광로를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걸 내려다 보는 내 눈에 그가 이쁘고 귀여웠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몇 병의 와인을 마셨는지, 그의 시선 앞에 벌거벗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당당했고, 그의 손을 이끄는 것에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를 안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고, 서로에게 처음인 것같은 떨리는 감각으로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한달간 지속되던 불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협탁 위의 진동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었다. 아이들이 돌아오기로 한 날이란 생각이 퍼뜩 일었던 것이다.


 "안 잤어?"


  남편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숨이 차올랐다. 올라오는 과호흡을 누르면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지금, 그 사람과 함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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