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을 통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바른 휴식이란 무엇일까
말레이시아의 오후. 낮 시간은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라서 아이들과 실내에서 놀거리를 찾아야 했다. 에어컨 덕분에 시원하고 쾌적한 복합몰 3층, 아이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이 있다.
수업에 두 딸을 데려다주고 나면, 나는 같은 건물 1층 카페에서 한 시간 정도 꿀맛인 나만의 블루 타임을 갖는다. 그 한 시간이 그리 순식간일 수가 없었다. 다시 아이들을 데리러 미술 학원에 올라가 그 문을 여는 순간, 학원 내 응축되어 있던 특유의 물감 냄새가 가득하게 전해온다. 학원 벽에 전시되어 있던 멋진 그림들을 보며, “아 예쁘다” 마음이 가곤 했었다.
몇 개월 지나 1층에서의 카페 블루타임이 조금은 지루해지기 시작할 즈음, 어른이 배울 수 있는 수업이 있는지 학원에 물으니 아이들 수업과 같은 시간에 흔쾌히 한 귀퉁이를 내어준다. 수채화를 배우는데 색과 물을 적절히 섞어 사물의 명도와 채도를 조절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로 말레이시아 전통에서 그림 그릴 주제들을 찾고는 했었는데, 전통의 캄풍 하우스와 함께 집 앞 야자수를 그려 넣으니 나만의 특별한 작품이 되었다. 문제는 그림 그리기에 집중할만하면 수업 시간 아이들 떠드는 소리, 번잡한 상황들이 연출되었다. 조용하게 집중해서 그릴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다 싶다. 지인들에게 물어 물어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 미스터 심의 화실을 찾았다. 아침 등교 마치고 연습하러 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학교에서 화실은 자동차로 10분 거리. 나는 운전 중에서야 아이들 등교 준비하느라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 무척 배고프다는 것을 인지한다. 화실이 있는 건물 바로 앞에 자그마한 호커(hawker)가 있다. 주로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먹는 아침 식사를 파는 곳인데, 밀가루 팬 케이크에 계란 야채 등을 취향 따라 넣어 구워주는 인도식 로티,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얇게 져 민 돼지고기와 청경채를 올린 흰쌀밥,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아침 주먹밥 나시 레막 등 다양한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벽을 따라 빙 둘러 위치해 있다. 정면 중앙 큰 공간에는 은색 철판 식탁에 형형색색 플라스틱 원형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사다가 편히 먹고 갈 수 있다. 한 끼에 4-5링깃 정도인데 음료까지 해서 한화 삼천 원 수준이다. 하지만 지역 로컬 식당이라 맛은 그 가격 이상이다.
나는 '락사'라는 말레이시아 국물 국수를 좋아했는데, 고등어에 타마린이라는 지역 뿌리채소 등으로 국물을 내고 숙주 등 야채를 얹어준다. 새콤달콤하면서도 생선의 진한 향이 강해 호불호가 있는 음식이지만, 나는 자주 즐겼다. 말레이시아는 기후가 덥고 습해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조금은 자극적인 오향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 좋았던 것 같다.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말레이시아 로컬 kofi를 한잔한다. 특유의 진하고 쌉싸름한 커피가 온몸을 감싸면 배도 든든히 부르겠다 아침 내내 종종 거리던 온몸에 긴장이 싸악 풀린다. 이제 그림 그릴 준비가 되었다. 건물 3층 심 선생님의 화방에 들어선다.
“자오샹하오 헬레나”.
나는 이곳에서 세례명인 헬레나로 살고 있다. 부모님이 주신 예쁜 내 이름 명(Myung)은 부르는 사람에 따라 '미용', '마이용' 등 제 각각으로 불리며 원래 소리를 잃기 일수여서였다.
중국 화교이신 심 선생님은 반달눈웃음을 하시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신다. 이곳은 한지에 중국식 수묵채색화를 그리는 화방이다. 도착하면 우선 신발을 벗고 비치된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조그마한 사기그릇 종지 세 개, 먹 벼루 하나, 책상보 1포를 챙겨 원하는 자리에 앉는다. 선생님의 부름을 기다리는 동안 벼루에 먹물을 갈면서 마음을 편안히 갖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덧 내 차례가 되어 이름이 불린다. 조용히 심 선생님 앞에 앉으면 오늘 연습할 주제와 사용할 한지를 주신다. 그날의 주제는 화조화. 푸르른 배 부분과는 달리 밝은 노랑 머릿 빛을 가진 작은 새 두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우선 선생님께서 번호까지 매겨가며 하나하나 그리는 시범을 보여주신다. 그 그림 종이를 그대로 들고 내 자리로 돌아와 배운 대로 연습해 보는 것이다. 주로 하루 2시간 정도 연습을 하는데, 10년 넘게 연습하며 이제 큰 정물화를 그리는 사람도 있고, 그림보다는 그저 차분하게 명상하기 위해 한자 글씨를 쓰러 온 젊은 아가씨도 있었다.
곱게 갈아 만든 밀도 있는 먹물, 그리고 노랑, 파랑 물감을 앞에 두고는 주어진 붓을 내 손에 길들인다. 먼저 먹물을 잔뜩 머금게 하고는 천천히 벼루 모서리를 이용해 먹물을 짜낸다. 덜 짜내면 한지 위에 뭉뚝한 형태 없는 원형을 만들게 되고, 너무 많이 짜내면 붓이 금방 건조해지면서 갈라진 선을 그리게 된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어깨, 팔꿈치, 손목을 부드럽게 하지만 단정하게 유지하면서 첫 번째 붓질을 시작한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그것마저도 붓 끝에 그 테가 난다.
새는 두 마리였는데, 하나는 크게 날개를 펴며 뭔가 지저귀는 모양새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꽃가지에 앉아 새초롬한 모양으로 그 다른 새의 소리를 듣는 모습이었다. 첫 종이에는 활짝 편 날개를 너무 크게 그리는 바람에 작은 종달새가 학 마냥 커져 비율이 맞지 않았고, 다음 종이에는 몸통과 머리 비율이 맞지 않아 이상한 새 모양이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연습하고 있자면, 심 선생님이 조용히 뒤를 지나가시면서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하신다. 살짝 팁도 얹어주시면서 말이다.
이제는 색감을 얹을 차례다. 노란색이 이쁘다고 물감을 그대로 찍어 화선지 위에 올리자면 색이 종이 위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그 자리에 서있는 느낌이다. 작은 종지에 덜어다가 물과 잘 배합해서 붓으로 부드러운 색감이 나올 때까지 섞는다. 그제야 그 색을 종이 위에 살짝 올린다. 자세히 보면 노란 새의 머리도 빛의 방향에 따라 슬쩍 붉은빛이 돌기도 하고, 그림자 덕에 어두운 빛을 띠기도 한다. 인디고블루를 노란색에 슬쩍 섞어 명암을 표현해 본다. 제법 그럴싸하다.
심 선생님의 화실에는 규칙이 있었다. 그림 그리는 중간중간, 화실 안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그림 보기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살짝 눈인사도 나눌 수 있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라는 선생님의 배려였다. 단 집중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하되, 항상 상대방의 그림에 장점을 보고 칭찬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말을 할 것. 상대방의 그림 품평을 하지 말 것. 이렇게 하다 보면 다른 분들로부터 전혀 다른 관점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 서로의 그림을 통해 색다른 각도나 색감을 배우기도 한다. 국제 학교에서 멀지 않다 보니, 중국 화교분들 뿐만 아니라 한국, 미국, 프랑스, 폴란드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하지만 각 문화의 다른 점을 배우고 경험해 보려는 그 배움의 마음은 모두 같은, 그런 이들이 모여 그림을 그렸다. 그날 그리기를 마치고 나면, 연습지 중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 한 점을 골라 들고 다시 심 선생님 자리에 간다. 종이 한구석에 그린 날짜와 나의 이름을 한자로 멋들어지게 써주시고 마지막에는 붉은 인주를 묻혀 낙관을 찍어 주신다. 제법 기념할만한 한 장의 작품이 된다.
말레이시아 이주 초기. 덥고 후덥지근한 기후에 적응하랴, 독박 육아하랴 나에게 블루 타임은 그저 육체적이던 정신적이던 멍 때림 일 때가 많았었다. 생각을 바꿔 쉼을 뭔가 창의성을 키우는 활동으로 바꿔보니, 상상 이상의 카타르시스도 있고 일상이 훨씬 재미있어졌다. 이후로 성격이 더 적극적으로 바뀌어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는 운동도 다니고, 사회 활동 모임에도 들어가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행사가 있으면 봉사자가 되기도 했었다. 사람의 에너지라는 것이 묘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보면, 있는 줄 몰랐던 숨은 힘이 자꾸 생겨나는, 기운의 선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진정한 블루타임을 즐기는 방법을 배웠던 행복한 추억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