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눈물 사이
감정은 참으로 변덕스럽다.
아침 햇살에 마음이 환해졌다가, 저녁노을 앞에서는 괜히 쓸쓸해진다.
아침에 받은 문자 하나에 세상이 다 내 편인 듯 어깨가 펴졌다가, 저녁에 들은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무너진 듯 푹 꺼진다.
동쪽을 향해 웃음을 터뜨리던 내가, 서쪽을 향해 눈물을 훔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진폭 안에서 흔들린다.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내리는 감정의 기복은, 마치 갯바위에 부딪혔다가 흩어지는 파도와도 같다.
웃음은 나를 가볍게 띄우고, 슬픔은 나를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그 두 힘 사이에서 인간의 영혼은 늘 진동처럼 흔들리며, 어느 쪽에도 완전히 고정되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 속에 삶의 진실이 숨어 있다.
만약 늘 웃음만 있다면, 그 웃음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만약 늘 눈물만 흐른다면, 그 눈물은 마침내 아무 의미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웃음과 눈물, 기쁨과 슬픔은 서로의 그림자이자 서로의 거울이다.
한쪽을 알아야 다른 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래서 옛사람들은 ‘일희일비’라 했을까.
이 단어는 생각보다 유쾌하고, 꽤나 해학적이다.
한 번 웃고, 한 번 울고, 그리 거창할 것도 없는 인간사인데 굳이 네 글자로 멋들어지게 붙였다.
정작 그 속내는 이렇다.
웃을 땐 그 웃음이 영원할 것 같고, 울 땐 세상 끝이 온 듯 절망한다.
하지만 한바탕 요동치고 나면 결국 배고파서 밥을 먹는다.
이쯤 되면 웃음과 눈물도 결국 허기 앞에서는 친구다.
삶의 감정 곡선은 마치 시골장터에 오랫만에 나타난 풍물놀이 같다.
꽹과리 소리에 덩실 춤추다가, 북소리에 눈물 찔끔 흘리는 일도 다반사다.
웃음과 눈물이 서로 장단을 맞추니, 진폭이 큰 사람일수록 인생이 풍성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크게 웃는 사람이 크게 울고, 사소한 일에 쉽게 속상해하는 사람이 사소한 일에도 쉽게 행복해진다.
그 진폭이 바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문제는 우리가 자꾸 그 파도를 고정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늘 웃고만 싶고, 눈물은 아예 봉인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인생은 없다.
있다면 마네킹일 뿐이다. 웃는 얼굴 하나로 매일 진열장에 서 있으니 말이다.
지혜란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중심을 알아차리는 데 있다.
울 때 “곧 웃게 되리라” 속으로 중얼거리고, 웃을 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미소 지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감정의 파도는 우리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삶을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하는 파도가 된다.
결국 인생이란, 동쪽을 향해 한바탕 웃고, 서쪽을 향해 한바탕 울다가, 저녁밥상 앞에서 “오늘도 잘 살았다” 하고 젓가락을 드는 것 아닐까.
그게 바로 일희일비의 지혜요, 해학이 아닐까 싶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