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작가의 열여섯 번째 편지
나무님.
오늘은 나무님께 편지를 먼저 씁니다.
‘웬일이에요?’라고 미소 지을 나무님이 그려집니다.
일 년쯤 지났을까요? 끊기듯 끊기지 않은 소식, 마음으로만 쓰고 부치지 못한 편지들.
오랜만이에요.
그간 중증의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았어요.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없지만, 구구절절 그 시간이 너무 무거워 저 밑에 내려놓고 천천히 녹여내려고요. 슬슬 봄이 오면서 저도 많이 좋아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나무님에게 새싹 피우듯 편지를 씁니다. 편지 쓸 마음은 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일 년이 지나버렸어요.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세월을 메울 수 없지만,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진 않을 거라 믿어요. 신뢰라는 건, 진심 어린 사과라는 건 그럴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랜만이에요. 너무 오랜만이라 미안하고, 참 반가워요.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읽었나요? ‘연금술사’는요?
나무님이라면, 그 책들을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인데. 전 소설책인 줄 알았다가 ‘속았다’, 싶어 잘 안 읽어지더라고요. 처음부터 철학책이나 에세이라고 했으면 잘 읽었을 텐데 말이에요. 어쨌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땐 이렇게 영향력 있는, 그러니까 책을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많이 판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어요.
이젠 감히 파울로 코엘료만큼 되긴 어렵다 해도 시도를 한 번 해보려 해요. 강원도엔 전에 석탄을 나르던 길을 연결한 ‘운탄고도 1330’이라는 길이 있어요. 이 길에 스토리텔링을 입혀 모큐멘터리 제작 시나리오를 쓰려고요. 영상팀과 함께 이 길을 영화로 제작해 사람들이 순례자란 책으로 인해 산티아고 길이 더 각광받게 된 것처럼 아시아의 산티아고 길로 ‘운탄고도 1330’을 걷게 되길 꿈꿔요.
제가 힘든 시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뭔가 나아지려고 노력해서가 아니라 다시 ‘꿈’을 꾸게 돼서가 아닐까 싶어요. 곧 6월부터 <영월, 김삿갓_노마드 시인, 김병연>이란 뮤지컬을 상설로 시작하고, 작년에 이어 <장릉 낮도깨비>도 더 다듬어 <1457, 잠든 소년>이란 부제를 붙여 공연 중이에요. 지금 김삿갓은 마지막 퇴고를 하고 있어요. 뮤지컬 극작은 이제 자신감이 좀 붙었는지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 되면서도, 작곡가와 연출과 배우들의 몫으로 넘길 단계란 생각이 들어요. 자신감이 없을 땐 미련이 남아 퇴고가 끝나질 않았는데, 이젠 제 실력으론 여기까지라고 인정했거나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어쨌든 영화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고, 어릴 때 순례자를 읽었던 기억이 나면서, 새로운 일에 다시 가슴이 두근대는 건 제 역마살이 직업에서도 드러나는 듯해요.
사람들은 한 직업을 갖거나 이직해도 유사한 직업군 내에서 하기 마련인데, 전 새로운 걸 하고 싶어 찾아다니는 것 같아요. 물론 저도 큰 틀에선 삶의 목적이 변하진 않아요.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얼마나 거만하고 거창한 목적입니까.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주고 싶다니요. 부끄럽지만, 그래도 놓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단 마음으로, 공부도 이것저것, 직업도 이것저것. 그렇게 삽니다.
제 스스로 우울증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하는 건 새로운 일을 자꾸 찾기 때문이에요. 요즘엔 하루에 한 통씩 해외 영사관이나 한국문화원에 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쓴 작품 중에 <장릉 낮도깨비_1457, 잠든 소년>을 들고 해외 공연을 가고 싶은데 그분들이 이 작품을 알아야 초청도 하고 그럴 거잖아요. 그래서 영사관 홈페이지도 구경하고, 한국문화원이 있는 나라들에 대해 조사도 하고 그러면서 이 나라에 가 보면 좋겠다 싶으면 메일을 보냅니다.
공연을 초청해주십사하고요.
어떤 나라는 답이 없지만, 어떤 곳은 올해는 계획이 다 차서 아쉽지만, 내년엔 초청하고 싶다고 하는 답변을 받기도 했답니다. 물론 예의상 보내셨을 수도 있고, 이런 무작정 보낸 메일이 귀찮으실지 모르는데도 용기를 내는 걸, 전 못할 줄 알았거든요. 왜 기업인들이나 성공 사례 같은 거 보면 제가 메일을 이백 통 보냈는데, 이런 얘기들 하잖아요. 근데, 소심한 마음에 실례가 될까, 용기가 안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요.
읽지 않는 사람도 많고, 답신이 오는 곳은 생각보다 많이 적지만 그래도 답을 해 주는 곳이 있고 다음을 기약하는 곳이 있다는 걸 보면서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스무 살의 패기를 경험하는 사십 대입니다.
스페인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어요. 독학이라 부족하고, 매일 꾸준히 하는 것도 아니지만, 멍하니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동사 변형 하나라도 공부하고 있어요. 하던 영어나 제대로 하란 소리도 들었지만, 그건 뭔가 학교 때 하던 기억에 재미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아예 모르는 언어를 처음부터 하는 기분으로 하니 재밌어요. 어젯밤에 공부한 건 “necesito ganar dinero para viajar” 난 여행하려고 돈 벌어야 해, 예요. necesito tomar agua para vivir 살려면 물 마셔야 해. 이런 응용 문장도 되지요. 이런 거 보면 많이 좋아졌죠?
오늘은 아주 초반에 편지를 쓸 때처럼 할 일을 제쳐두고 먼저 편지를 씁니다. 다시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손을 내밀어 봅니다.
요즘 급히 하는 일은 저 꿈꾸는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지역 상점들을 스토리텔링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픈 바람에 납품 기일을 맞추지 못했던 일이라 얼른 해야 하는데, 이제야 합니다. 그래서 더 가게들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진도가 안 나가네요. 그래도 잘 마무리해서 가게에도, 영월군에도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삶을 기피하다가 나아졌다고, 깊이 없이 떠든 편지가 되었어요.
작가들은 사실 수다쟁이가 아닐까 싶어요. 말로 떠들지 못하는 걸 종이에 잔뜩 떠들어대는 수다쟁이요. 좀 더 맛깔스럽게 수다 떨도록 노력해볼게요.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무님.
다음 편지엔 좀 깊이 있어져 볼게요. 봄과 함께....
0309.11시 46분에. 영월에서 선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