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바로 어머니의 수술에 관련된 얘기... 어머니가 수술을 받는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지난 8월 어느 날이었다. 무릎의 연골이 다 닳아 없으신 어머니는 완충장치 없이, 뼈와 뼈가 맞닿아 거동하실 때마다 항상 고통을 받으셨고, 나이가 일흔이 넘은 시점에서야 비로소 수술을 결정하셨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수술이라 한쪽 다리씩만 할 수 있는 수술, 두 번에 걸쳐 시행해야 비로소 완료가 되는 그 수술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어머니 당신이 스스로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셨으리라. 나이가 들어서 당신의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저 당연스럽게 여기셨고, 혹시나 자식들 발목 잡을까 본인 아픈 건 내색도 안 하고 계시다가, 결국 모자란 자식들이 그 사실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항상 참고 사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신 어머니는 누나와 나에게도 늘 인내하는 삶을 강조하셨었고, 본인 스스로도 그 미덕을 늘 지켜나가셨다. 그 미덕이라는게 무언지, 미련하게도 육신의 고통까지도 참으면서 인내로 하루하루를 지켜내신 어머니의 삶...
어머니는 전라남도 장흥의 촌에서 나고 자라셨다. 어머니가 세 살이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고, 어머니는 친아버지인 , 나의 외할아버지를 그때 여의셨다. 전쟁 후에 재가하신 어머니의 어머니, 즉 나의 외할머니는 눈치가 보였던 나머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여식인 어린 어머니를 키울 수가 없었고, 어머니는 먼 친척에 맡겨져서 부모인 외할머니와는 떨어져서 유년시절을 보내는 것으로 어머니의 첫 번째 인내가 시작되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다행히도 친척 어르신이 어머니를 어여삐 여기셔서 자기한테는 계란이 담긴 도시락도 싸주시곤 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알고 있다. 그런 어린 나이에는 그러한 친척의 배려들보다 부모의 살가운 사랑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부모를 보지도 못하고,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남의 집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태생적으로 갖은 순하고 성실한 성격은, 모르는 사람들의 집안일도, 심부름도, 농사일도 기꺼이 하게 만들었고, 그 집안에서도 그 잔망스러운 여자아이가 대견하다고 생각하지 았았을까 싶다. 아마도 계란은 그런 의미의 보상이었으리라... 그렇게 어머니는 부모의 사랑이 결핍된 유년기를 스스로 인내하며 보냈다.
어머니는 지역 내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조폐공사에 취직을 하셨다. 어려서 어머니의 고향 인근 지역인 보성에 사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농고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서울의 한 유통회사로 취직을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장거리 연애를 하셨고, 그렇게 어머니의 두 번째 인내는 시작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월급이 너무 작아 서울에서의 방세, 생활비도 감당하기 빠듯한 신세였었는데, 어머니가 매달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의 월급에서 일부를 떼어 아버지께 보냈다고 했다. 어머니도 돈이 필요했던 가난의 시기에 하셨던 행동이라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던 가난과 인내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어머니는 옆에도 있어주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남자친구를 위해, 본인이 대신하여 그렇게 고난의 시간을 택하셨는데, 촌구석 출신의 무뚝뚝한 남자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고맙다는 얘기 한번 없으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아버지가 전재산을 사기를 당하셨다. 두 살 터울의 누나와 나 그렇게 우리 네 식구는 제주도라는 낯선 곳에서 돈 한 푼 없는 생거지 신세가 되었다. 그때 사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신들의 직장까지 그만두고 전 재산을 가지고 타지인 제주도로 사업을 위해 갔던 때였어서 상황은 더 급격하게 안 좋게 흘러갔다. 항상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였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믿고 생업을 포기하고 떠났다가 졸지에 타지에서 극한의 가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이후,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안 해 본일이 없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했던 타지에서의 인내의 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갔다.
내가 스스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무렵, 내 눈에 비친 어머니와 아버지는 항상 일로 바쁘신 분들이셨다. 시간이 항상 없으셨고 두 분 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도 제대로 못 챙기며 사셨다. 어머니는 판촉물 영업사원으로 매일 수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다리가 성 할 날이 없이 일을 하셨다. 사실 그런 두 분의 희생으로 가족들은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모아서 어머니의 작은 꿈이었던 선물가게를 내게 되었다. 어머니가 차렸던 가게는 말 그대로 구멍가게 정도의 작은 크기였지만, 누나와 나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짓고 멋진 포부를 품고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고된 인내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하루를 쉬셨는데, 그 쉬는 날에는 동대문, 남대문에서 물건을 떼오는 작업을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차가 없으셔서 항상 걸어 다니셨고, 나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양초니 인형이니 선물상자들을 들쳐 매고 지하철을 타고 가게로 나르는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휴일은 어머니에게는 일주일 중 가장 고된 날이구나...' 그렇게 고된 생업의 반복 속에서 쉬지 않는 세월을 어머니는 또다시 보내셨다.
내가 대학생이 돼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손이 좀 덜 가고 수익이 그나마 나오는 일을 찾아서 숙박업을 택하셨고, 신림동의 한 모텔을 임차하여 운영하셨다. 기껏 임차인 신분인지라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별도의 관리인이나 청소원을 둘 수가 없으셨던 부모님은 모텔의 청소와 설비, 운영을 직접 하셨고, 새로 시작된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동에(4개 층의 계단으로 수시로 오르내리는 갖가지 작업들) 아버지의 건강이 서서히 안 좋아지셨다. 몇 년간 숙박업으로 고생을 해서 벌었던 종잣돈을 가지고, 경기도의 원룸촌에서 은행대출을 받아 조그마한 3층 짜리 원룸건물을 사셨고, 그렇게 원룸 임대업으로 업종을 바꾸셨다. 그때 업종을 바꾼 또 하나의 이유는 아버지의 건강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의 요양을 위해 바닷가와 숲이 가까운 동네를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쉬지않으셨던 아버지는 50대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집의 가장이 돼야 했고, 아직은 모자란 자식들을 위해 또다시 인내를 택하셔야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시간이 쉴 새 없이 또 흘러갔다.
그렇게 나의 어머니의 세상은 인내에서 인내로 이어졌다. 첫번째, 두번째가 모자라 셀수없이 지내온 인내의 역사... 그렇게 인내만 하시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아픈 노인이 된 나의 어머니는 어려서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그 시절을 인내했고, 젊어서 연인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그 시절을 또 인내했고, 결혼하고 오랜 가난의 세월을 이겨내기 위해 인내했고, 사랑했던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부양할 자식들 생각에 슬픔을 이겨내고 또 인내했다. 그렇게 항상 남의 눈치만 보고 남을 위해서 사는 동안에 어머니의 젊음도 그렇게 어머니가 믿던 인내의 삶과 함께 아득히 멀어졌고 그렇게 사그라졌다. 그렇게 어머니는 남들이 얘기하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격언에서 앞의 반쪽만 열심히 지키다가 뒤의 반쪽은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셨다.
수술을 안 받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어머니는 마침내 무릎 연골 수술을 받으셨다. 너무나 해져버린 무릎을 이끌고 마침내 수술을 받게 된 어머니가 통증에 힘들어하셨고, 그것이 누나가 나에게 아침부터 전화를 한 이유였다. 누나가 나에게 요청하는 것은 돈 문제도 뭣도 아닌 그저 내가 어머니 웃을 수 있게 전화해서 애교를 부려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누나는 아버지를 닮아 애교도 없고 무뚝뚝하다. 그리고 나는 누나에 비해서는 애교가 많은 성격이다. 나는 어머니를 많이 닮긴 했는데, 어머니의 애교 섞인 모습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삶에 부딪히고 찌들어서 어머니는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으리라... 언젠가 한번 어머니의 학창 시절의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귀엽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교복 입은 사진이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나는 이제 안다. 고난과 인내로만 점철되었던 어머니의 인생에도 분명 웃음 많고 애교가 넘쳤던 젊음의 계절이 있었다는것을... 사실 원래는 그런 분이었다는 사실을...
작년 초겨울에 내가 어머니로 인해 뜻밖의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다. 어느날 어머니가 장에 갔다가 당신이 좋아하시는 딸기의 비싼 가격에 놀라서 '한 달만 더 기다려보자'라는 생각이 들으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내가 왜? 뭐 때문에 내가 먹고 싶은 딸기를 한 달이나 더 기다려야 하지?'라고 말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인생에서 그런 결정은 처음이셨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딸기를 사 드셨다고 했다. 그때 그 얘기를 듣고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무언가 먹고 싶다 할 때, 비싸든 어떻든 못이기는척 늘 사주시던 어머니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인내의 세월 동안 어머니의 젊음을 잘도 빼먹었던 모지리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가 인내 않는 모습에 고마웠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늘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려 아들의 애교를 마음껏 보여드려야겠다. 그리고 퇴원하실 때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초겨울의 비싼 딸기도 함께 먹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