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이어나가게 하는 계기란 의외로 사소하다
그리 많은 나라를 여행해본 것은 아니지만 살면서 지금껏 가본 공항 중 가장 긴 통로를 지나가야 했던 곳을 꼽으라면 나는 당연히 하와이 오아후 섬에 위치한 대니얼 K. 이노우에(Daniel K. Inouye International Airport) 공항을 꼽을 것이다. 정확한 구간의 길이가 어떻게 되냐고?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실제 측정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 심리적인 거리에 근거해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때는 바야흐로 2020년 1월.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기로 하고 처음 하와이에 도착했던,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기내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추워 플리스 쟈켓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입었다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확 코 끝으로 달려들던 뜨거운 공기와, 유학길에 올라 다소 긴장하고 근심에 차 있던 나와는 달리 여행객 모드로 잔뜩 흥이 올라 가볍게 발걸음을 내딛던 수많은 사람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정도 거리는 서울 웬만한 지하철 역에서 환승할 때도 걸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왜 그리 걸어도 걸어도 끝은 보이지 않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느낌이었을까? '여기가 내가 앞으로 몇 년간 지내야 하는 곳이구나' 생각하며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며 걸었던 그 통로의 왼편에는 황량한 연베이지 색의 공항 건물들이 보이고 저 멀리 무지개도 하나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곳에 온 걸 환영한다'라고 외쳐주는 것만 같아 조금은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나중에 알고 보니 하와이는 하루에도 여러 번 무지개가 뜨는 곳이었다).
그렇다. 이건 약 일 년 반이 지나 남기는 내 유학생활의 첫날의 기록이다. 사실 브런치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이날의 기억을 기록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오히려 이날은 내 유학생활에 있어 너무 의미 있고 중요한 날이었기에 그 어느 글보다도 신경 써서 기록하고 싶었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인 나는 '언젠가는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매일의 일과에 치여 미뤄두다가, 기억이 더 휘발되기 전에 박제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침내 오늘 이렇게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려 본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미국에 도착한 직후 첫 이틀간 나는 굉장히 우울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낡고 낡은 기숙사 탓이 컸다. 하와이 대학교는 가격에 비해 낡고 오래된 건물로 악명 높은데, 당시 그곳에서 수학 중인 다른 학생들로부터 그 악명에 대해 사전에 듣고 간 탓에 애당초 기대치가 높지도 않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내 눈으로 본 기숙사는 나의 이미 낮을 대로 낮은 기대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상태였다. 책상과 의자는 30년은 족히 돼 보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거의 60-70년이 된 건물이었음). 이후에 시간이 좀 흘러 여기저기 꾸며도 보고 정이 들고 나니 아늑하게 느껴졌지만, 당시만 해도 새 주인인 나를 위해 싹 치워진 탓에 황량하기까지 했던 그 방이 예뻐 보일 래야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낡은 방에서 내 남은 청춘을 보내야 한다고? 말도 안 돼. 그냥 나 못하겠다고, 한국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해야겠다! 이게 내 솔직한 도착 직후의 소감이었다. 유학생의 생활이 휘황찬란할 거란 기대는 원래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마치 생전 한국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와이 판 고시원 같았다.
그렇지만 오자마자 돌아간다고 하면 한국에 계신 내 지도교수님 입장이 난처할 터였다. 기왕 왔으니 여행 왔다 셈 치고 이번 학기는 어떻게든 버티고 종강하면 돌아가야겠다며 장엄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서 바로 다음에 한 일은 나의 도착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부모님에게 연락을 드리는 것이었다. 살면서 본 방 중에 가장 낡은 방에 받은 충격도 잠시, 어찌 됐든 이번 학기 내내 부모님을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휴대전화를 이리저리 돌려 최대한 방이 예뻐 보일 각도에서 사진을 두어 장 찍은 후 부모님께 전송했다. 그다음에는 햇빛이 잘 들어 최대한 화사해 보일 법한 위치에 앉아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저녁 비행기를 탔건만 시차로 인해 나는 한국에서였다면 이미 지나갔을 동일한 시간을 다시 지나고 있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바로 받으시는 부모님에게 있는 힘껏 밝게 웃으며 잘 도착했고 방도 너무 깨끗하고 캠퍼스도 너무 좋다! 고 하얀 거짓말을 둘러댔다. 환하게 웃으며 통화하는 내 모습을 보시고 안심하신 부모님은 흡족해하셨고 다음 주에 시작되는 새 학기도 파이팅이라고 응원을 건네주셨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나는 이내 다시 몰아치는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에 압도되어 아주 잠깐 훌쩍이다가, 그래도 새로운 곳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심에 감사기도를 올린 후 내 키만 한 캐리어 두 개에 터질 듯 들어찬 짐들을 하나씩 풀었다.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나오던 나의 짐들. 가구가 다 낡아서 걱정하며 걸레에 물을 묻혀 닦아보았는데 그래도 새 주인이 온다고 청소는 열심히 해둔 모양인지 의외로 먼지는 묻어나지 않았다. 빈 공간에 하나하나 물건들을 채워 넣으며 하와이 도착 첫날의 일과는 그렇게 저물었다.
둘째 날은 학과 사무실에 가서 중요한 서류들을 제출하고 서명을 하는 일련의 행정 처리, 그리고 지도교수님이 되실 분과의 첫 면담이 예정돼 있었다. 시간상 우선 그전에 학과 사무실과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국제학생처에 들러 몇 가지 서류부터 제출해야 했다. 이전까지 여행을 혼자서 잘만 다녔던 내가, 이상하리만치 첫날 공항에서의 길고 황량한 복도와, 둘째 날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캠퍼스의 풍경을 일 년이 더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일회성 여행의 시작이 아닌, 꽤 오랜 기간 진행될 유학의 첫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였을 때도 혼자서 뉴욕 UN본부도 빨빨거리며 잘만 돌아다니고 차이나타운에서 고기만두도 사 먹고 프랑스에선 잘 통하지도 않는 프랑스어로 시장 바닥에서 흥정까지 했던 나인데, 도착 이튿날 학과 사무실에 가서 필요한 각종 서류들에 서명을 하고 관련 부서에 들고 가서 담당자를 만나고 간단한 인터뷰를 하는 그 일련의 사소하고 간단한 일들이 왜 그리도 버겁게 느껴지던지! 거기엔 아직 개강 전이라 개미새끼 한 마리 찾기 힘든 조용한 캠퍼스 분위기도 한몫했다. 캠퍼스를 걷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이따금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빼고는 정말 '생명체' 자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마트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터라 끼니를 때우기 위해 캠퍼스 안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서브웨이에 가서 맛대가리도 없는 (왜 같은 브랜드인데 한국과는 내용물이 다른 건지) 샌드위치를 사서 우걱우걱 열심히 씹어 삼키는데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혼밥은 한국에서도 자주 하던 일인데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타국 땅에서 입맛에도 안 맞는 걸 먹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캠퍼스 생활에 적응도 하고 친구들도 사귀면서 애들과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은,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거의 초기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우울감에 빠진다는 것이었다. 그들도 도착한 직후 첫 며칠간 우울함에 시달렸는데, 당연히 가장 큰 이유는 주거지를 옮기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안(이건 국내에서 거주지를 옮길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한다)였고, 모국의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개강 전에는 캠퍼스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극대화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막연한 걱정(높은 성적, 장학금 등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걸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당시에는 나 혼자만 그런 우울한 기분을 느끼는 거라 생각해서 더 위축되었던 것도 같다.
다시 둘째 날 일정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지도교수님과의 면담이었다. 면담 시간보다 30분 일찍 학과 사무실에 들러 외국인 학생이 서명해야 한다는 (가히 백과사전 급으로 두꺼운) 서류 뭉치를 전달받고 교수님 연구실 바로 옆에 위치한 방에서 서류들을 한 줄 한 줄 읽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에 뒤를 돌아보니 지도교수님이 서 계셨다. "네가 한국에서 온 Jeannie 지?" 2시에 한국 애랑 미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방에 한국인 애가 하나 있었으니 당연히 뒷모습만으로도 나임을 아셨을 것이다. 앗, 아직 내 뇌는 교수님과의 면담에 준비가 안됐건만! 얼결에 맞다고 대답하고 잔뜩 긴장한 채로 들어섰던 연구실의 공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사실 한국에서도 학회에서 몇 번 뵈었던 분이고 스카이프로 미팅도 했었건만, 막상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로 만나게 되니 새삼 그렇게 어색하고 낯설고 긴장이 될 수가 없었다.
"반갑다. 오늘 기분이 어떻니. 혼란스럽니? 정신이 없니? 정리가 안된 느낌이니?"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 잊어버렸지만 당시 교수님이 쓰셨던 형용사들은 아마도 disorganized, confused 등의 단어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단어들이 모두 그 순간의 내 감정을 정확히 짚은 것들이라 많이 놀랐다. 어느 정도까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할까 찰나의 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결국 I'm fine thank you,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대답을 하고 씩 웃어 보였지만 지금껏 나와 같은 유학생들을 수십 명도 넘게 봐온 교수님은 아마 그 표정 너머의 내 속마음을 짐작하셨던 모양이다.
"하와이는 처음이니? 하와이가 아니더라도 이전에 미국에 와본 적이 있니? 여기 아는 학생이 있니?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누구랑 대화했니? 점심은 어디서 먹었어?"
밀려드는 질문에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리며 하와이는 처음이지만 본토는 이전에 몇 번 가본 적이 있고 이곳에 아는 한국인 학생은 없지만 기숙사 옆방 친구와 아침에 마주쳐서 인사했고 점심은 서브웨이가 열려있길래 거기서 사 먹었다, 고 짧은 영어로 힘겹게 대답을 늘어놓자 교수님 왈, "너 영어 잘하는구나." 예, 제가요? 그날 아침부터 한국어로 쓰여있어도 쉽지 않았을 온갖 세금 서류와 비자 서류들을 읽고 서명하고 제출하러 이리저리 뛰어 다닌 게 갑자기 밀려오면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첫 면담부터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짧은 대화가 지금까지 나를 이곳에서 공부하게 했고 조금 더 견뎌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기분이 어떻냐던 교수님의 첫 질문을 듣는 순간 그 직전까지 나를 에워싸고 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고요한 바다를 보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럽고, 긴장되고, 걱정되고, 두려운 기분이냐고 묻고는 조용히 내 반응을 살피던 그 눈빛에서 '나는 지금 네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라는 메세지가 읽혔다. 이곳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래 어쩌면 나는 잘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조금 더 버텨볼까?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국의 지도교수님은 '너무 멀리 보지 말고 그냥 오늘 하루, 이번 한 주만 잘 보내자는 생각으로 지내라'고 당부하셨었다. 그 순간에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미국의 지도교수님을 만났던 그 첫 면담 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번 학기만, 또 이번 학기만, 둘째 날의 결심은 몇 번이나 갱신되어, 나는 현재 2년 차 박사 과정생으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살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은 때가 있다.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고 애당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순간 말이다. 타인의 웬만한 말이나 행동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심연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때로 너무나도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인 것도 같다. 지나치듯 물어본 '지금 기분이 어떻냐'는 그 질문이 내게 주었던 위로와 응원을 생각할 때마다, 앞으로 남은 박사 과정 기간 동안에도 분명 힘든 순간은 또 찾아오겠지만 그때에는 좀 더 성장한 내가 잘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솟아난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티도 나지 않는 코딱지만한 개울가 옆 땅에 촘촘히 미나리 씨앗을 뿌려나갔던 것처럼, 두 눈 크게 뜨고 봐도 보일랑 말랑한 흔적이겠지만 그래도 좀 더 이곳에 내 노력의 흔적들을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기분에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무심하고 시크하게 그렇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면서 이 질문을 건네줄 것이다.
"지금 기분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