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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언니 Aug 18. 2023

청첩장을 기쁘게 받지 못하는 나이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어쩌다 시작하게 되었는데 생각했던 거보다 오래가는 모임들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모임이었다. 행동대장인 멤버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 보자며 올린 연락이었다. 그렇다. 이제는 이유가 있어야 만나는 모임들이 많아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반가웠다. 아직은 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시간을 맞추고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안 본 사이 멤버 중 두 명은 여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나와 다른 한 명. 우리도 분발하자! 하고 헤어진 게 마지막 모임이었다.


만나기로 한 날 하루 전 단체 카톡방에 연락이 왔다. 갑자기이긴 하지만 드릴 게 생겼다고.

우리 나이쯤이면 드릴 거라는 건...


한우? 고기? 아니다. 그렇다. 청첩장이다.


행동대장인 멤버가 축하한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다들 기뻐해주는 훈훈한 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분위기상 나도 축하한다는 멘트를 보내고서(축하 안 하는 마음은 아니니까) 마음의 밑바닥에서 진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아 내일 가기 싫다.'


몇 년 전 알고 지내는 언니들과의 모임에서 '청첩장'이 대화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한 언니는 자주는 아니지만 때때로 안부 묻고 지내는 친구인데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티도 하나도 안 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줄게 생겼다며 청첩장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얘기를 전해 들은 멤버들 간에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지만 핵심은 이거였다.


"나도 왜 이런 마음까지 드는지 모르겠는데 꽤 섭섭하더라."  그리고 서럽더라는 것.


그때만 해도 내 나이 삼십 대 되기 전이었으니

"에이~ 언니 아직 안 죽었어요. 언니 부족한게 뭐가 있다고 서럽기까지 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언니 아직 안 죽었어!!" 하는 반응이 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진심이었으니까.


청첩장 준다는 동생(그렇다. 또래이긴 하지만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그 멤버는 동생이었다)의 커밍아웃을 듣고 서러웠다는 언니가 단박에 떠오른 건 우연의 일치였을까. 다행인 건 혼자 땅굴파면서 폭주하지 않고(?) 결이 맞는 멤버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이번 모임에서 청첩장 준다는 얘기를 미리 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만나기 하루 전에 숟가락 하나 슬며시 올리는 것 같은 저 아이가 묘하게 얄미워..  올해 초만 해도 헤어지고 힘들어하길래 우리가 토닥토닥해줬잖아. 아... 나 벌써 막 결혼 이런 거에 타격받는 나이 된 거니?"라고.

평소에 이렇게까지는 표현 잘 안 하는 나 인걸 알기에 바로 통화 한 번 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일하는 시간 쪼개면서 까지 오는 연락을 받아 넋두리하고 싶진 않았다. 막상 내뱉고 나니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 아닌건가 싶기도 하고.


몇 시간 뒤면 어쩌다 청첩장 받는 날이 되어버린 그 모임을 간다. 비록 나는 일을 쉬고 있지만. 근거 없는 허리염증에 직립보행이 아직 어색하지만. 하필 오늘 그날이 시작되었지만. 며칠째 썸남에게 연락은 없지만.


나가기로 했다. 그 녀석 썰이나 듣고 맘껏 부러워하며 축하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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