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어쩌다 시작하게 되었는데 생각했던 거보다 오래가는 모임들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모임이었다. 행동대장인 멤버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오랜만에 다 같이 얼굴 보자며 올린 연락이었다. 그렇다. 이제는 이유가 있어야 만나는 모임들이 많아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반가웠다. 아직은 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시간을 맞추고 함께 볼 수 있다는 것이. 안 본 사이 멤버 중 두 명은 여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나와 다른 한 명. 우리도 분발하자! 하고 헤어진 게 마지막 모임이었다.
만나기로 한 날 하루 전 단체 카톡방에 연락이 왔다. 갑자기이긴 하지만 드릴 게 생겼다고.
우리 나이쯤이면 드릴 거라는 건...
한우? 고기? 아니다. 그렇다. 청첩장이다.
행동대장인 멤버가 축하한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다들 기뻐해주는 훈훈한 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분위기상 나도 축하한다는 멘트를 보내고서(축하 안 하는 마음은 아니니까) 마음의 밑바닥에서 진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아 내일 가기 싫다.'
몇 년 전 알고 지내는 언니들과의 모임에서 '청첩장'이 대화의 주제가 된 적이 있다. 한 언니는 자주는 아니지만 때때로 안부 묻고 지내는 친구인데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티도 하나도 안 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줄게 생겼다며 청첩장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얘기를 전해 들은 멤버들 간에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지만 핵심은 이거였다.
"나도 왜 이런 마음까지 드는지 모르겠는데 꽤 섭섭하더라." 그리고 서럽더라는 것.
그때만 해도 내 나이 삼십 대 되기 전이었으니
"에이~ 언니 아직 안 죽었어요. 언니 부족한게 뭐가 있다고 서럽기까지 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언니 아직 안 죽었어!!" 하는 반응이 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진심이었으니까.
청첩장 준다는 동생(그렇다. 또래이긴 하지만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던 그 멤버는 동생이었다)의 커밍아웃을 듣고 서러웠다는 언니가 단박에 떠오른 건 우연의 일치였을까. 다행인 건 혼자 땅굴파면서 폭주하지 않고(?) 결이 맞는 멤버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이번 모임에서 청첩장 준다는 얘기를 미리 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만나기 하루 전에 숟가락 하나 슬며시 올리는 것 같은 저 아이가 묘하게 얄미워.. 올해 초만 해도 헤어지고 힘들어하길래 우리가 토닥토닥해줬잖아. 아... 나 벌써 막 결혼 이런 거에 타격받는 나이 된 거니?"라고.
평소에 이렇게까지는 표현 잘 안 하는 나 인걸 알기에 바로 통화 한 번 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일하는 시간 쪼개면서 까지 오는 연락을 받아 넋두리하고 싶진 않았다. 막상 내뱉고 나니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 아닌건가 싶기도 하고.
몇 시간 뒤면 어쩌다 청첩장 받는 날이 되어버린 그 모임을 간다. 비록 나는 일을 쉬고 있지만. 근거 없는 허리염증에 직립보행이 아직 어색하지만. 하필 오늘 그날이 시작되었지만. 며칠째 썸남에게 연락은 없지만.
나가기로 했다. 그 녀석 썰이나 듣고 맘껏 부러워하며 축하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