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좀 그렇긴 하지만...
#변소
그 시절, 일반 가정집에 목욕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변소도 그랬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공중의 개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우리도 세든 사람과 함께 쓰기도 했다. 변소는 대문에 들어서면 왼쪽 측면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재래식이었다. 대문 밖에서 보면 벽에 낮은 높이의 조그만 문이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똥을 푸는 바가지가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구였다. 대부분의 변소는 청소 때 아래에서 위로 퍼내는 방식이고 보면 나름 머리 써서 만들어진 것 같긴 했다. 무엇보다 집 밖에서 그 일을 했으니 위생에도 나름 신경 쓴 구조다. 또 그런 만큼 그 시절엔 똥지게를 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즘은 환경 미화원으로 격상됐지만 그때는 쓰레기 청소부와 함께 가장 대접받지 못하다 사라진 직업이 아닌가 한다.
나름 머리 써서 만들어진 변소긴 하지만 꼭 편한 공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곳을 낮에 가는 건 상관이 없지만 어쩌다 밤에 갈 일이 생기면 난감했다. 혼자서는 무서워 도저히 갈 수 없고 꼭 누군가를 대동하고 간다. 밝기라도 했으면 덜 무서웠을 텐데 그곳의 전구는 밝기가 별로였다. 그래서 발이 빠지거나 또는 징그러운 손이 불쑥 나올 것만 같은 무서운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텔레비전의 영향도 있었는데, 가끔 <웃으면 복이 와요>(70년대 mbc지상파 TV에서 방송했던 인기 장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납량 특집을 한답시고 꼭 변소 귀신이 나온다. 그런 것들이 밤에 변소를 가는데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좀 나은 편이다. 어렸을 때 외가에 가는 게 큰 즐거움이었는데 그래도 꼭 한 번은 망설여지는 건 변소가 정말 무섭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얇은 판자 대기로 얼기설기 만들어져 정말 용변을 보다 빠질 것만 같다. 거긴 정말 변소라 고도 부를 수도 없는 곳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변소는 시멘트에 타일을 부친 튼튼한 발걸이를 자랑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외가는 나중에 집수리를 해서 그런 곳으로 탈바꿈했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꼭 변비에 걸릴 것만 같았다.
우리 집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유일하게 썼던 사람은 치질을 앓고 계신 아버지였다. 그 외 나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은 신문지를 16절지 정도의 크기로 잘라 구겨 사용했다.
그래도 밤에 소변을 보는 경우는 낫다. 요강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늘 사용할 땐 모르겠는데 훗날 사용하지 않게 되고 어디선가 우연히 보게 되는 때가 되면 왜 그렇게 민망하던지. 조상 대대로 사용했던 물건인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요즘엔 요강의 새로운 용도 변환이 있는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나라 요강에 과자나 사탕을 담아 놓거나 화병 대용으로도 꽃을 담아 놓는다고 하니 말이다.
남의 집을 잘 다녀 보지 못한 나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잘 몰랐다. 다 우리만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2학년이 되어서야 처음 친구네에서 놀기 시작했다. 하루는 우리 반에서 가장 예쁜 L의 집에 놀러 갔다. 그 아이는 정말 얼마나 예쁜지 화장실 같은 곳은 안 다닐 것만 같았다. 그런데 놀다가 오줌이 마려 변소를 찾았더니 웬걸 우리 집 같지가 않았다. 그곳은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그것도 쪼그리고 앉는 것이 아니라 양변기 말이다. 하지만 난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젠가 집안 행사로 큰 고모 댁을 간 적이 있었는데 집안이 좀 잘 살았다. 그야말로 대궐 같은 집에 화장실이 양변기였다. 그걸 사용하기엔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시트가 사이즈가 맞지 않아 소변이 옆으로 세는 것이었다. 그게 어찌나 당황스럽고 찝찝하던지 그 실수를 또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쪼그리고 앉아 볼 수 있는 곳이 없냐고 했더니 없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한사코 좌변기를 마다하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을 테고, 오죽했으면 L의 언니가 그냥 편하게 앉아서 일을 보면 된다고 간접 시연까지 해 보였다. 그래도 나는 절대로 거기서 오줌을 눌 수 없다고 거의 버티다시피 했다. 결국 두 자매는 나에게 굴복하고 부엌 수채 구멍에 일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민폐란 생각이 든다.
#다락
다락은 위치상 부엌 위에 있었고 그곳으로 통하는 문은 안방에 있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많지는 않았지만 제법 가팔랐고, 군것질을 좋아했던 아버지가 그 계단에 식빵이나 전병 과자 같은 간식거리들을 두곤 했다. 옛날의 식빵은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푸른곰팡이가 피곤했다.
우린 가끔 그곳에 올라가 놀기도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그곳은 버리자니 아깝고 그냥 두자니 짐인 잡동사니들이 많았다. 물론 꼭 그런 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가끔 사용하지만 버릴 수 없는 물건들 있었을 것이다. 특이한 건 제법 두툼한 일본 잡지가 몇 권 있었다. 나는 엄마나 아버지가 잡지를 포함해 책을 읽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그 잡지들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또한 함석(?)으로 만든 제법 큰 함이 있었는데 거기엔 주로 안 입는 옷들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난 결코 기억에 없지만 어렸을 때 입었다던 색동저고리와 치마가 있었다. 그건 어쩌면 언니가 먼저 입었을 확률이 높은데 굳이 확인은 안 해 봤고, 이젠 몸에도 맞지 않아 더 이상 입을 수도 없었다. 그게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느새 자라서 이런 옷도 입을 수 없게 되었는지 앞으로도 못 입을 텐데 엄마는 그걸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비록 몸엔 안 맞아도 가끔 입어주면 기분이 새로웠다.
다락은 큰 창문이 나 있었고 대부분 그렇듯 단열재 같은 건 전혀 사용하지 않아 겨울엔 춥고, 여름에는 무척 더웠다.
#걸레 그릇의 용도
마루엔 미닫이문이 달려있었다. 가을에서 겨울까지는 상관이 없는데 따뜻해지는 봄부터 여름까지는 마루 끝에 걸터앉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문의 미닫이를 위해 문지방에 까맣고 가는 철제 심을 깔아 놓았는데 그게 햇볕을 받으면 꽤 뜨거웠다. 잘못하면 화상도 입겠다 싶었다. 게다가 마루의 턱이 좀 높았다. 어른이야 그 뜨거운 부위를 피해 한 번에 오르내린다지만 나와 동생은 키가 작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강아지처럼 찡찡대자 엄마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건 마루 끝에 걸레 그릇을 놓고 거기에 앉아서 신발을 신고 벗으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역시 번거롭고 기분 안 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느니 안 하고 만다. 또 다행히도 얼마 안 있어 나도 과감하게 신발을 벗고 한 달음에 마루를 올라가 봤다. 그랬더니 됐다. 하지만 신발 신을 땐 어쩔 수 없이 걸레 그릇을 사용했다. 그래도 신발을 벗을 땐 그게 필요 없다는 게 어딘가. 나는 그렇게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가스중독
그 시절엔 왜 그렇게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많았는지. 그건 심심찮게 신문에도 오르내리는 중대 사고였다. 어렸을 땐 남에게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은 우리에겐 일어나지 않을 거란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가스 중독 같은 사고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우리 집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 일해 주는 식모(가사도우미) 언니가 가스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추운 날 부엌문을 꼭 닫고 점심상을 차리는데 방금 전까지 만해도 방에서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언니가 갑자기 조용했다. 그때 부엌은 밥상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차릴 수 있도 배식구라 할 수 있는 조그마한 문이 안방을 향해 나 있었다. 엄마와 난 그곳을 통해 부엌을 내다봤더니 언니가 거의 대자로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급하게 부엌으로 달려가 언니를 엎어 안방에 뉘었다. 그리고는 동치미인지 김칫국물을 한 사발을 퍼와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언니는 꾸물꾸물 정신이 돌아왔다. 그건 그 시절 연탄가스 중독 때 흔히 사용하던 민간요법이었다. 국물 속에 이산화탄소 성분이 있어 정신을 깨어나게 해 준다나 뭐라나. 그렇게 해서 효과를 보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때서야 병원에 실려 가곤 했다.
요즘 같으면 결코 있을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 시절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은 공단 지역에 많이 진출을 했고, 남의 집 가정부로 취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언니도 남의 집 귀한 딸일 텐데 그런 일을 겪게 하고 그런 검증되지도 않은 민간요법을 쓰는 건 옳은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그나마 그렇게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있다 아버지는 대대적인 집수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