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려쳐지지 말자
해가 갈수록 이 일을 하면서, 진정한 열정과 의지는 결국 보수, 돈에서 나온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다.
실제로 클라이언트가 내게 주는 보수만큼, 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걸 종종 본다. 적은 돈을 내게 주면, 내게 미안해하면서 일을 덜 주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본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다). 반면 돈을 내게 충분히 많이 주는 만큼 매우 엄격하고 하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되려 훨씬 편하게 대하며 나를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있다. 보통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현실은 정 반대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에르메스와 동네 마트의 차이
이런 경험을 하면서, 백화점의 명품 브랜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늘 럭셔리 플로어에 가서 쇼핑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쩌다가 정말 정말 갖고 싶어서 산 시계나 옷, 가방, 주얼리 같은 것이 집안에 하나쯤은 있을 거다. 그리고 근처 다이소나 동네 지하쇼핑몰, 아웃렛에서 시간이 없어서 마지못해서 산, 혹은 그냥 마음에 들어서 산 비슷한 물건이 역시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떤가?
약간 마음에 안 든다 한들, 어느 정도 비싼 값을 주고 산 물건은 그 자체로 큰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최소한 그런 옷은 장롱에 썩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최소한 내가 매일 입는 속옷이나 티셔츠처럼 그 옷들을 드럼세탁기에 넣어서 몇 시간씩 빨고, 역시 몇 시간씩 고온에 드라이를 하면서 함부로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만큼 돈을 지불했으니, 아무리 싸구려 재질에 쉽게 헤진다 하더라도 그 옷은 다른 옷들과 다른 차별점을 지닌다. 오히려 더 세심하게 관리하고 아껴입게 된다.
생각해보자. 에르메스가 동네 마트처럼 반값 세일을 하면서 소비자를 유혹했다면 지금의 에르메스가 과연 존재했을까? 에르메스가 어떻게 가방의 품질을 관리하고 심지어 남은 재고를 과감히 폐기 처분하는지,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난 이와 비슷한 경험을 일을 통해서 겪는다. 나야 아직 에르메스, 프라다는 커녕 아직 동네 아웃렛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내게 지불하는 돈에 따라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그런 경험을 늘 겪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돈을 어느 정도 충분히 받을 때라야, 내가 제대로 작가로서 나의 의견이 존중받고 나의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되려 내게 불필요한 지시를 내리며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이리저리 방향을 못 잡게 하는 경우는 대개 충분한 보수를 주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계약은 이제 그만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돈을 받고 일하지 말자.
나의 재능을 펼치든 내 꿈을 펼치든 간에, 어쨌든 남의 작품을 그리는 일이다. 제삼자가 껴서 이런저런 매니징을 하게 되면 결국 그것은 온전한 나의 작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림작가가 더 돈을 많이 받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래야만 어느 정도의 의욕이 생기고,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생기며, 그것을 후회 없이 마무리 짓고 나의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림책, 만화책, 그래픽 노블 같이 호흡이 길고 그려야 할 그림이 많은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또한 Budget이 너무나 작은 자잘한 프로젝트 5-6개를 매니징 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의 큰 예산이 들어오는 프로젝트 2-3개까지만 하면서 연례 계획을 세우는 게 훨씬 좋다. 그런 너무나 작은 프로젝트 하나하나 끝내고 나서, 과연 보람 있고 즐거운 마음이 들었는지? 오히려 귀찮으니까 빨리 쳐내야지 하는 생각과, 왜 내가 이런 일을 맡아서 하지? 하는 후회와 분노에 힘들었던 적이 더 많지 않은가?
일을 열심히 해서 잘 마무리짓고, 나를 위한 선물로 맛있는 차와 달콤한 케이크, 오랜만에 사고 싶었던 옷 한 벌, 예쁜 구두 한 켤레, 혹은 보고 싶었던 책이나 영화도 볼 수 없을 정도의 적은 돈이라면, 그런 일은 아예 계약은커녕 재고도 안 하는 게 낫다. 그저 내게 한 줄 경력이 된단 이유로 너무 적은 보수, 불공정한 계약을 하면, 창작자는 매우 오랫동안 불행해진다. 그런 불행한 창작자는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결국 좋은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 계약을 끝내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않은가. 오히려 원하는 보수를 못 받고 일하면 그 스트레스로 더 충동구매를 종종 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작품을 너무나 싼값에 그리면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큰 부작용이 생긴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밀린 돈을 받아도 전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심각한 번아웃에 휩싸이게 된다. 당연히 한다고 계약은 했으니 의욕은 없는데 일을 억지로 끌고 가게 되고,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에 대한 동기가 저하된다. 내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지속 가능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계속되면 창작자로서 우울증이 심각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점점 없어진다. 제대로 된 돈을 받고 일해야, 스스로의 일에 대한 책임감도 생기고 나의 멘털을 제대로 지킬 수가 있다. 정말이지, 적은 돈으로 이런저런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들은 모든 창작자들의 자존감 도둑이며 진정한 Time Stealer 다. 우리들의 인생은 모두 소중하지 않은가?
창작자의 생태계를 위해서
적은 돈을 받으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다른 창작자들을 위해서 이기도 하다. 이미 ㅋ몽 같은 재능마켓 사이트들 때문에 이미 단가는 10년째 제자리이다 못해 더 떨어지긴 했지만… 여기서 더 떨어지면 꿈을 펼치고 싶은 다른 창작자들은 처음 소일거리로 일을 시작하다가 종국에 경제적인 이유로 꿈을 결국 접게 된다. 정말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들이 결국엔 그림을 그만두는 것이다.
아니, ‘재능 마켓’이라는 단어도 웃긴다. 재능을 어떻게 물건처럼 사고판다는 것인가? 의사들, 법조인들같이 비교적 크리에이비티랑 거리가 먼 사람들은 전문직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정작 생활의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고 디자인하는 심미안을 가진 제품 디자이너, 영상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후려치느냔 말이다. 가령 법조계 사람들에게 당신의 재능을 일당 5만 원에 팔아보라고 권할 수 있는가? 더한 창의력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편의점 일당도 못 되는 돈을 주면서,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더한 것들을 요구하고 귀찮게 하는 건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범죄라는 생각은 안 드는 걸까. 우후죽순 생겨난 여러 비슷한 사이트를 보면, 크리에이터들은 그저 자판기에 걸린 값싼 캔커피 같은 존재인 걸까 하는 회의감이 든다.
디자인, 건축, 영상,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모두 약간의 분야는 다르지만 다들 공통점이 있다. 단 몇 년의 연습이나 단 한 번의 시험만으로는 결코 프로가 될 수 없으며, 타고난 재능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주변의 많은 격려와 지지, 그리고 (특히 대학교에서) 충분한 경제적인 지원이 필요한 분야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그런 노력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면서, 정작 대학을 갓 나온 창작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재능과 노력을 제대로 존중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들은 니들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만큼 좀 돈 덜 받으면 안 돼?”같은 마인드가 아직도 장착된 클라이언트나 회사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면서 디즈니나 픽사, 드림웍스, 넥플릭스나 구글 같은 회사의 성공스토리를 쫒으며 그들처럼 되자고 한다면… 그건 좀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아닌지. 그저 좀 더 많은 창작자들이 제대로 존중받고 일할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