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저번 시간에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그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해 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동네 김밥천국만 한 돈을 주면서 미슐랭 파이브 스타 같은 음식을 내놓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의욕도 없고 할 힘도 나지 않는다. 늘 생각해보면 적절한 시간과 내 노력에 걸맞은 보상을 주는 클라이언트와 하는 프로젝트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더 잘해야지 하는 의욕이 들어 남은 힘까지 다 끌어올려 일을 해왔다. 반면 적은 돈을 주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서로 얼굴 대면하고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잔소리만 하는 클라이언트와는 다시는 일하고 싶지도 않고, 작업 기간 내내 내가 왜 이런 업체랑 일하는 건지 큰 후회를 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종종 겪고 있는 일이다.
그럼, 비교적 적은 예산을 갖고 일을 해야 할 경우에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할까?
이번에는 시간과 예산에 따라 그림의 퀄리티를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1. 그림을 과감히 다운 그레이드 Downgrade 하자
그림책의 경우,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스토리 보드, 완성까지 일반 일러스트에 비해 정말 해야 할 일이 많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때문에 가능하면 적절한 기간 내에 제대로 된 보수를 받으면서 일을 하는 게 나도 만족스럽고 출판사도 만족스러운 그림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림책을 기준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만약 내가 이상적으로 원하는 금액을 100이라고 치면, 해당 출판사가 50 정도의 금액이 최대치라고 하며 내게 오퍼 메일을 준다고 치자. 그렇다면, 딱 50 정도의 금액에 해당하는 그림만 그리는 것이다. 내가 최대치로 모든 것을 끌어올려 그릴 수 있는 디테일한 풀컬러 그림을 100%이라고 치면, 딱 50% 정도로 세부 디테일을 포기하면서 최대한 인물과 배경을 단순화시키거나, 인물의 숫자나 옷의 디테일을 간략화하여 가능한 쉽게 그려주는 방법이다.
본인이 하는 작업 과정을 되감기 해보면 어느 부분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알 것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부분을 줄이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복사 + 붙여 넣기 + 약간의 왜곡 과정을 거쳐 빨리 진행을 한다. 포토샵이나 페인터의 Lasso 툴과 채우기, 그리고 여러 텍스쳐 효과를 이용하면 많이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 여러 연습을 하면서 그림체를 다각화하는 게 필요하다. 일 때문에 신경을 못쓰고 있지만, 나도 늘 계속 쓰던 툴로 익숙한 방식으로 그리다 보니 평소에 여러 그림 스타일을 시도해봐야 될 것 같다.
어떤 책은 표지만 컬러고, 내지가 흑백 그림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아동용 도서가 아닌 초등 고학년, 중학생 아이들이 보는 책들은 그림보다 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이런 흑백 그림은 당연히 컬러 그림보다 단가가 낮고, 낮은 만큼 좀 더 빨리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봐야 한다.
2. 일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이기
만약 내가 원하는 금액을 100% ~120% 라고 가정하고, 내가 해당 기간 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7-8시간 동안 매일 일을 한다고 치자. 최고의 퀄리티를 내기 위해 나는 열심히 일할 것이고, 가능한 주말은 일하지 않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야근과 주말근무를 불사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다. 작가에 따라 자신의 기준이 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림책 같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의 경우 최대한 많이 받아야 하며, 자신이 납득이 될 수 있을 만큼 가격협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하의, 50% 정도의 예산을 권유받으며 오퍼 메일을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실 모든 출판사들이 다 크고 매출이 좋은 것은 아니다. 크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테마를 가지고 오랫동안 책을 출판해 온 중소형 출판사들이 꽤 많이 있다. 많은 그림작가와 글 작가들이 이런 작은 출판사와 연을 맺으면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런 경우엔, 아예 일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여서 딱 그만큼만 시간을 맞추고 일을 할 것을 권하고 싶다. 최선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작업시간이 8시간이면, 딱 그 반절인 4시간 정도만 일하고 가능한 일을 늘리지 않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퀄리티는 좀 낮아지겠지만, 되려 시간을 늘려 작업한다손 쳐도 그만한 의욕이 잘 안 난다. 냉정하게 받는 돈의 액수를 월급, 주급, 시급으로 나눠서 따져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하루에 투자하면 되는지 계산을 해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납득이 안 되는 돈으로 계산이 나온다면, 그런 일은 아예 안 받는 것이 낫다. 그런 푼돈 보다도 작가의 멘탈이 더 중요하고, 멘탈만큼 작가의 시간, “인생”이 더 중요하니까.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작가이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비로소 일에 대한 보람과 만족을 느낀다. 그것은 그 일이 자신에게 맞든 안 맞든, 그 일을 더 좋아하든 덜 좋아하든 다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애정과 의욕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부분이 나의 열정과 맞지 않으면 그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큰 번민과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열정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이젠 쉽게 못 돌아갈 것 같다. 바로 그 지점부터 모든 작가들이 프로가 되는 것 아닐까?
3. 추가금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마감기간을 지나서 그림을 제출할 때가 있다. 아니, 그럴 때가 대부분이다. 내가 마감시간을 못 지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품이 많이 드는 일인 만큼 커버 이미지나 간지 이미지, 그 외 자잘한 수정 등 마감일이 지나도 신경 쓸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보통 나는 수정 사항 등은 출판사들의 재량에 맡기는 편이다. 출판사들이 알아서 작가를 존중하면서 딱 필요한 수정사항들만 지시를 해주면 좋겠지만, 어떤 출판사들은 과한 수정을 계속 요구하거나 아예 몇몇 페이지는 전면 개정을 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스토리보드 단계에서 많이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가끔은 정말 화가 날 정도의 이상한 요구를 파이널 단계에서 할 때가 있다. 가장 좋은 건 아예 그런 업체와는 일을 안 하는 것이 좋겠지만, 모두 다 첫인상은 멀쩡한데 그 누가 이 회사가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아예 수정을 한 번만 한다고 못 박으면서 기한을 정해 끝내겠다고 선 통보를 하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 해당 업체에 추가금을 요구할 수 있다. 수정 한 번마다 얼마, 혹은 시급이나 월급 단위로 계산을 해서 얼마, 이런 식으로 액수를 정해서 통보를 하는 것이다. 보통 프리랜서들은 한 번에 다양한 일을 같이 하거나, 1년 스케줄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일정 기간 이상으로 작업이 늘어질 경우 다음 프로젝트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추가금을 더 요구하면 상대방이 알아서 수정 사항을 줄인다던지 없앤다던지 해서 판단을 할 것이다. 좀 불안하다면 아예 이런 부분까지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이 좋다.
가능한 모든 클라이언트들과 만족스러운 예산으로 일을 하면 좋겠지만… 귀국 후 새로 시작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4년 차 이건만, 아직도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