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닌 선택

『패배의 신호』, 샤를 vs 앙투안, 그리고 ‘적당한 여자’라는 환상

by 서유진


이 리뷰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읽을 때면 인물들의 욕망은 어김없이 미끄러지곤 한다.


사강은 소설에서 늘 사랑을 말하지만, 결코 사랑으로 끝내지 않는다. 『패배의 신호(La Chamade)』는 루실이라는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한 삼각관계의 클리셰를 넘어서, 여자가 사랑 앞에서 ‘우아하게 패배하는’ 방식을 기록한다.


루실이 택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한 여자가 택한 가장 우아한 항복이다.



샤를: 결혼에 최적화된 남자


샤를은 서른인 루실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중년의 사업가다. 지적이고, 너그러우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그는 루실을 연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녀가 떠났을 때 붙잡지 않았으며,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떤 질책도 없이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가 내민 마지막 제안은, 결혼이다.


그러나 그 결혼은 사랑의 맹세가 아니라, 평온한 삶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계약에 가깝다. 그가 진정 바랐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안정된 일상 속의 동반자. 루실이 자신의 삶에 다시 편입되기를 원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샤를은 ‘안정형’이다. 성숙하고, 강요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남자. 이른바 ‘결혼용 남자’라고 불리는 그 범주에 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런 샤를과 루실 사이에는, 뜨거움도, 절박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앙투안: 사랑의 불을 지폈으나 끝내 감당하지 못한 남자


반면 앙투안은 금발의 젊고 잘생긴 신문기자다. 루실은 점점 그에게 참을 수 없이 이끌려 샤를 곁을 떠난다. 처음엔 모든 것이 생생하다. 젊음, 에로티시즘, 불안, 욕망. 루실은 앙투안을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하지만 곧 균열이 생긴다. 루실은 앙투안의 현실 감각을 버거워하고, 앙투안은 루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매혹되었지만, 함께 살아갈 수는 없었다.


앙투안은 루실을 “연애할 여자”로는 넘치게 사랑했지만, “함께 살아갈 여자”로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루실 역시 그와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확신을 구하고, 점점 불안한 여자가 되어간다.


결혼용 여자 vs 연애용 여자


어떤 남자들은 여자를 이분법으로 나누곤 한다.

“연애는 저런 여자랑, 결혼은 다른 여자랑.”


루실은 그 경계 어디쯤에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런 구도에 들어맞는 사람이었을까?


루실은 사랑받고 싶었고, 동시에 자유롭고 싶었다. 보호받고 싶으면서도, 소유당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앙투안과 함께할 때 그녀는 자유를 포기해야 했고, 샤를과 함께할 때 그녀는 욕망을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루실이 끝내 택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욕망의 사망신고에 가깝다.


하지만 프랑수아즈 사강은 루실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삶을 유지하기에 충분치 않을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샤를과의 결혼은 루실에게 자기 감정의 퇴각이자 생활의 안착이다. 루실은 샤를의 여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더 이상 흔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앙투안이 요구했던 감정의 격렬함, 샤를이 제시한 안정과 풍요. 루실에게는 그 어떤 삶도 완전하지 않았다.


『패배의 신호』는 사랑의 패배를 이야기한다.

루실은 끝내 사랑을 택하지 못했고, 그 욕망을 껴안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실패는 문장 안에서 유예되고, 관능적으로 기록된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모든 소설이 그렇듯, 이 패배는 오히려 어떤 승리보다도 아름답다. 감정의 균열과 선택의 뒤편에서, 우리는 삶 속의 우아한 퇴각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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