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삶을 감당하는 방식에 대하여

『스토너』와 시지프 신화

by 서유진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그 주인공, 스토너의 삶 만큼이나 고요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이 책에 대해 찬사를 하길래 충동적으로 읽은 이 소설.

솔직한 감상으로는 초반이 다소 템포가 느려 연신 하품을 하며 읽었으나, 스토너가 문학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는 밥도 먹지 않고 단숨에 읽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밥보다 책이 먹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이 소설도 그랬다.

참 고요하면서 무감한 소설. 그러나 이 무감함은 정교한 전략이자 하나의 미학이다. 『스토너』는 위대한 이야기란 반드시 위대한 사건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토너는 왜 ‘위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현대 문학의 많은 인물들은 갈등을 통해 중심 서사를 이끈다.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변하지 않음’을 통해 서사의 구조를 거슬러간다. 그는 침묵하고, 후퇴하며, 비주류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낸다.

이러한 Anti-Hero적 주인공은 종종 무력하다고 오해받지만, 책을 읽어보면 실은 그가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존재임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가 택한 침묵은 타협이 아니며 어떤 비겁함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의 침묵은 마치 시지프 신화의 스토너의 삶의 방식은 자연스럽게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시지프는 신들의 벌을 받아 거대한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지만, 그 바위는 결국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 형벌은 무의미하고 반복적이며, 인간의 삶처럼 부조리하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지프는 자신이 밀어올리는 바위의 부조리함을 인식하면서도 그 바위를 다시 떠맡는 것을 스스로의 선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스토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삶이 때때로 부당하고, 고통스러우며, 심지어 외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회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수업을 준비하고, 글을 쓴다.


스토너에게 있어 삶은 그 자체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는 삶을 해명하려 애쓰기보다는 끝까지 살아내는 방식으로 감당한다. 그의 행위는 마치 시지프의 바위처럼 무의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반복 안에서 그는 자기만의 존엄을 지켜냈다.


『스토너』의 미학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병치될 수 있다. 카뮈는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고 보았다. ‘신은 없고, 우주는 침묵하며, 인생은 끝없는 반복일 뿐’이라는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자기 삶을 하나의 행위 예술로 구성해야 한다.

반복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스토너는 학문적으로 큰 성취도 없이 매일 강의를 하러 학교에 다녔으며, 그의 모든 사랑은 실패하고, 가족과는 단절됐다.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수업을 준비하고, 문학을 사랑했던 행위는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의 행위 그 자체이다.


이 점에서 『스토너』는 사르트르의 주체적 선택론보다는, 카뮈의 부조리 속의 수용에 가깝다. 스토너는 세상을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자기 삶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의 무력해 보이는 일상은 실은 극도의 윤리적 책임감의 다른 얼굴이다.


20세기 후반 이후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반영웅 서사는, 세속적 성공의 해체와 내면화된 저항의 승인을 통해 문학의 중심을 재구성해왔다. 『스토너』는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너져 가는 삶 속에서 사랑하는 존재들을 지키는 방식으로 독자와 공명한다.

가정이라는 장(場)에서 아내와 딸 사이의 관계 단절, 직장이라는 장에서 권력 구조의 폭력, 사랑에서 끝내 실패함을 통해서 스토너는 세속적 삶의 거의 모든 실패를 겪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어떤 비열함도 택하지 않는다. 이는 실존의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형태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인물이 ‘이루어낸 것’으로 사람의 삶을 평가한다. 그는 선택받지 않았지만, 선택했으며, 주목받지 않았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사랑받지 못했지만, 끝까지 사랑했다.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말하고자 했던 삶의 형식으로서의 인간성이다.


『스토너』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대신,

한 인간이 ‘살아간다’는 그 사실 하나로 완성된다. 그것은 문학이 여전히 인간의 내면에 닿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며, 실존의 윤리가 세속적 가치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살아낸 삶은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니다.



이디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불편함


『스토너』는 한 남자의 내면과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지만, 그 서사의 정교함이 모든 인물에게 균등하게 적용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의 아내 이디스는 종종 평면적이고 악의적인 여성상으로 묘사된다. 독자로서 이 인물의 반복되는 불안정성과 폭력적 반응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악역이나 ‘남성 주인공의 고난 서사’를 위한 장애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디스의 초기 서사를 더 들여다보면, 그녀의 불안정한 감정 상태와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 이면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암시하는 구절들이 드문드문 배치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암시다.


이디스가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장면이나, 죽은 그를 회상할 때 보이는 극단적인 긴장감과 불편함, 그리고 결혼 이후 스토너에게 신체적 접촉을 거부하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장면들에서 성폭력 혹은 정서적 학대의 가능성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스는 이러한 배경을 분명한서사로 풀어내지 않았다. 사실 이 배경을 자세히 묘사했다면 어떤 독자는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스토너가 문학이라는 세계를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물이었다면, 이디스 또한 충분히 자신만의 고통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언어를 발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독자에게 스토너의 침묵은 존엄으로 해석되지만, 이디스의 침묵은 불화로 소비된다.


이 차이는 결국 작가가 선택한 시선의 중심과 감정의 배분에서 비롯된다.이 점에서 『스토너』는 실존의 숭고함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특정 인물의 실존은 온전히 서술하지 못한 소설로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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