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고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문학 작품인 동시에, 인간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해부다.
이 작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고전적 인간 이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자멸적 충동, 자기기만, 불합리성, 무의미함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린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전직 하급 관료다. 하지만 그의 직업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로, 사회를 철저히 경멸한다. 그는 은둔자이자 관찰자, 냉소주의자이자 자기 혐오자, 타인을 증오하지만 누구보다 인정을 갈구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자기 내부에서 모순되고 충돌하는 욕망들을 가진 인물은 근대 이후 인간의 원형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전적 인간상—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자기 통제 가능한 주체—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혼돈과 고뇌, 의지와 무기력 사이에서 휘청이는 지하적 자아를 지닌 주인공을 세웠다.
“인간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선택한 자유 의지를 위해서, 심지어는 자기 이익에 반하는 방식으로도 행동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핵심 철학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계몽주의적 인간관을 부정한다.
인간은 이익과 쾌락이 아니라, 때때로 고통과 파멸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의지를 확인하는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2×2=4는 건방지다. 2×2=5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생기지 않겠는가?”
‘2×2=4’는 절대적 이성과 논리의 상징이다. 하지만, 지하인은 그런 정합성에 숨이 막힌다. 그는 불합리를 통해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이때의 자유란, 우리가 이상화하는 도덕적 자유가 아니라, 파괴적이고 허무한 자유, 즉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는 자유다.
구원이 아닌 파멸로써의 자기 의식
지하인은 사유하는 존재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분석하고, 사유하며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혐오한다.
이 사유는 지하인에게 고통의 원천이다. 그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너무 의식하기 때문에 행동할 수 없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는 자의식의 역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죄, 모순, 그리고 진실
이 작품에서 불편한 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추악함을 전면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지하인은 비열하고, 이기적이며, 병적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악의조차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독자는 그것이 단순한 변명이 아님을 곧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도,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같은 모순과 잔혹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가 느끼는 이 불쾌함도 바로 자기 인식의 고통이 아닐까.
인간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고, 윤리로는 구원되지 않으며,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간은 아름답고 끔찍하다.
사실 이 책은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가장 냉소적이고 힘들었을 시절, 가장 애정했던 책이다. 하지만 다시 읽으니 분명히 불쾌한 지점이 여럿 있었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병적인 자기연민, 타인에 대한 악의, 무기력한 자기 파괴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인간성의 이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혼탁함 속에 부정할 수 없는 정직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너무 날카롭게, 너무 깊이 들여다보기에 피하고 싶어지는 그 응시 속에, 나는 어떤 진실을 보았다.
바로 그 진실 앞에서 나는 이 책을 또다시 읽고 싶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읽게 되리라는 예감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