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그리고 음악성의 진실

음악성은 타고나는 걸까, 길러지는 걸까?

by 서유진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적수가 아니었다. 적수가 되기에 살리에리는 너무 유능했고, 너무 성실했으며, 너무나도 성공한 음악가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악장이었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오페라 작곡가 중 하나였다. 빈 국립극장의 프로그래밍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항상 보였다. 또한 무대 뒤에서는 수많은 젊은 작곡가들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등의 저명한 이름들이 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였다. 불안정한 후원과 가정 내 잦은 갈등 속에서도 찬란한 음악을 토해냈고, 서른다섯 해의 짧은 생을 살았다.


(그림 1. 영화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오늘날 살리에리는 한 단어로 기억된다. ‘질투.’

살리에리 증후군은 자신보다 재능 있는 자의 등장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비극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질투할 필요도 없었다. 모차르트가 사후 인정받은 음악가라면 살리에리는 명예 속에 살았던 음악가이다. 뿐만 아니라, 살리에리는 오히려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공공연히 인정하며 도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 두 사람을 천재와 범재, 음악성과 기술이라는 이분법의 상징처럼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도가 불러일으키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음악성은 타고나는가, 아니면 길러지는가.


나는 예술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떤 말이 계속 불편했다.

“쟤는 음악성이 진짜 좋아.”


일단 그 칭찬의 방향이 나를 향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 치기심 따위는 일단 접어두고서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악보를 배우고,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충실히 따르는 견습 단계의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음악성’이 있다는 칭찬을 듣고, 어떤 학생은 그저 ‘기술이 좋다’는 말만 들었다.

음악성은 결국 연습의 양이 아니라 질에 대한 평가일까? 아니면 사회성이 좋고 눈치가 빠른 아이가 얻는 또 다른 이름일까?

나는 그래서 한동안 음악성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오해받는 살리에리의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연주와 청취의 축적이 반복되자 그 말이 단지 추상적인 것에 머무는 단어가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음악성은 단순한 재현 능력이 아니라, 정서의 파형을 읽고, 그에 반응하는 감응의 기술이다.


음악학적 관점에서 음악성은 형식과 프레이징에 대한 직관, 루바토와 다이나믹을 다루는 시간 감각, 음색의 스펙트럼을 조율하는 판단력, 그리고 청각적 상상력을 모두 아우르는 복합적 능력이다.


정확성 너머 악보의 구조를 이해하고, 표현된 것에서 표현하지 않은 그러나 의도한 숨결까지 되살리는 일이다. 예컨대, 프레이징을 통해 한 문장을 구성할 때, 단순한 박자 단위가 아닌 의미 단위로 악절을 나눌 수 있는가, 쉼표 뒤의 정적이 단절이 아니라 긴장의 연장으로 기능하게 만드는가, 혹은 한 음 안에서의 타건이 어떤 심리적 반응을 유도하는가 같은 문제들이 여기에 속한다.


음악성은 즉흥성을 통해 더 도드라지기도 한다. 실시간으로 변주되는 해석, 특히 실내악이나 콜라보 연주처럼 타인의 루바토와 다이나믹을 청취하며 그에 반응하는 연주는 연주자의 감정적 반사신경을 날카롭게 훈련시킨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교가 아니라 감각의 동시성이다.



살리에리는 그 모든 감각을 훈련을 통해 축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작곡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분석가였고, 스승이었으며, 체계적인 양식에 대한 이해를 갖춘 실천가였다. 그는 당시 빈의 작곡 교육 커리큘럼을 정비했고, 오케스트레이션과 성부 대위법의 틀을 정리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반면 모차르트는 ‘자연 언어로 음악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성 전개를 무의식적으로 처리했고, 형식을 구성할 때조차 극도로 자유롭게 구조를 뒤틀었다. 그에게 음악은 기술 이전의 감각이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대비는 우열이 아니다. 살리에리는 음악성을 길러낸 사람이고, 모차르트는 그것을 타고난 사람이다. 중요한 건 둘 다 진짜라는 것이다.


음악성은 사실 감응의 문제다. 어떤 연주는 단 한 음으로도 청중을 울린다. 그건 그 음이, 연주자의 내면과 작곡가의 정서가 동일한 진폭으로 진동하기 때문이다. 음색의 온도, 쉼표의 밀도, 레가토의 방향성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가 도달하는 구조의 문제다. 그러므로 음악성은 청중의 감정에 도달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은 음악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팝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감각, 슬픈 멜로디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 그 자체가 음악적 감응의 증거다.


그러나 연주자로서의 음악성은 더 정밀한 훈련을 요구한다. 청음 능력, 형식 구조에 대한 직관, 음색을 조절하는 판단력, 감정을 언어화하는 능력까지. 그것은 길러지는,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영역이다.


음악성은 정체된 자질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형되고 확장되는 감각이다. 우리는 모두 그 지형 위에 서 있다.. 모차르트는 단숨에 그 지형을 통과한 사람이고, 살리에리는 평생을 들여 그 지형을 설계한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그 지형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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