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야, 제발 좀 가자!
3차 예방접종이 끝난 이후 이른바 '코산책'이라고 부르는, 강아지 안고 동네 한 바퀴 돌기를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를 빙 둘러 걷기도 하고, 때로는 단지 내 화단에 걸터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사료를 한 알씩 주었다. 바깥세상에 익숙해져야 진짜 산책을 시작했을 때 보호자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올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에는 하네스를 채워 나갔다. 진짜 걷기 전에 하네스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하네스를 채우기 전에 먼저 목줄을 시도해 보았는데 녹록지 않았다. 호두는 아주 작은 강아지라 구할 수 있는 가장 짧고 얇은 목줄을 채워도 손가락 서너 개가 들어갈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호두는 목줄을 채우기만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채워진 목줄을 물어뜯으려고 몸부림치며 화를 내곤 했다. 아이가 사료를 한 주먹 쥐고 호두 코 앞에 흔들면 그 냄새에 홀려 겨우 진정을 했다. 그렇지만 사료 받아먹기를 끝내자마자 다시 목줄을 벗기 위해 홀로 사투(?)를 벌였고, 간간히 목줄 물기에 성공하면 목줄이 쭉 미끄러져 마치 재갈을 물린 듯 입을 가로질러 채워지고는 했다.
하는 수 없이 하네스를 사서 입혔는데, 이 또한 호두가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물어뜯지 말라고 끈이 아닌 면(面) 구조로 만들어진 하네스를 입혔는데, 처음 몇 차례는 계속 물어뜯으려고 몸을 꺾어보고 뒤집어보며 난리를 치곤 했다. 다행히 목줄처럼 이빨에 걸려 물리지는 않았다. 반복적으로 입혀 보았고, 호두는 번번이 반항을 시도해도 제 뜻대로 물어뜯어지지 않으니 결국 포기하는 듯 보였다.
하네스 적응을 마치고, 모든 예방접종이 끝났다. 대망의 진짜 산책을 하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까지 우리는 모두 부푼 기대로 집을 나섰다. 그동안 호두가 벽지를 물어뜯는다든지, 집에서 이른바 말티푸 타임이라 불리는 흥분상태의 전력질주를 일삼는다든지, 가족들 발 뒤꿈치만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낑낑 투정을 부린다든지 할 때마다 인터넷 반려견 카페를 통해 강아지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문의글을 남겼었는데, 모든 문제행동에 있어 70%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는 답변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기 강아지가 에너지 분출을 다 못해서 그래요. 예방접종 끝나고 산책을 나가서 에너지를 소진하면 나아질 거예요.]
드디어 우리 호두도 산책을 통해 에너지를 쪽 뺄 수 있다니! 강아지를 들이기 전부터 다 함께 손잡고 저녁마다 집 근처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곤 하던 우리 가족이니, 실컷 걸어서 강아지 힘을 빼주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지금쯤 예상하겠지만, 맞다. 큰 오산이었다.
늘 코산책을 나가던 단지 앞 화단에 평소처럼 걸터앉아 사료를 몇 알 주다가 호두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놔 보았다. 세상에나. 호두가 아주 기함을 했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느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끼잉끼잉, 히잉히잉... 다시 저를 안아 올리라고 앞발을 가족들 무릎에 걸쳐가며 이족보행을 서슴지 않았다. 예방접종 주사를 맞으러 들어가는 모습 이후로 이토록 슬픈 강아지의 눈빛을 이렇게 금방 다시 마주할 줄이야.
오늘부터 코산책 끝, 진짜 산책 시작의 꿈은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 뒤로도 한동안 코산책 중에 잠시 호두를 바닥에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호두가 제 발로 바깥세상을 걷는 것에 익숙해질 시간을 가져야 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며칠 반복하자 호두는 살살 주변 냄새도 킁킁 맡아가며 가족들 발치 주변을 서성거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진짜 산책을 시작해 볼까?
호두가 다음 단계를 그렇게 쉽게 따라와 줄 리가 없다. 우습게도 원래 호두는 경계심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해맑음의 대명사였는데, 산책을 시작하자 세상 다시없을 쫄보로 변해버렸다. 바깥세상의 모든 것이 그저 무서운 것 같았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부왕, 멀리서 울리는 오토바이 소리에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사료로 어르고 달래서 다시 걸음을 떼게 만들어도, 금방 저 앞에서 누군가 다가오면 또다시 얼음이 되어 버렸다. 얼음 땡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급기야 걷지 않겠다며 네 발을 지면에 붙인 채 무게중심을 엉덩이 쪽으로 실어 버티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두야, 제발 좀 가자!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기는커녕, 매일 아파트 단지 밖으로도 못 나가보고 호두와 집 앞에서 대치상황을 벌이다 돌아오고는 했다.
호두가 세상 만물에 대해 느끼던 두려움을 상당 부분 내려놓기까지 별다른 계기는 없었다. 매일 산책을 빙자한 대치를 겪다가 그냥 어느 날 조금 더 걷기 시작했고, 얼음이 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러다 어느 날은 다시 심해졌고, 또 괜찮아지기도 했고… 들쭉날쭉 왔다 갔다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아직도 호두는 가끔 낯선 사람이나 차 소리에 한 번씩 과민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마주치는 행인들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 가끔 으르렁거리거나, 마구 짖거나, 무서워하며 얼어붙을 때가 있다. 무슨 기준인지 우리도 알지 못한다. 호두만의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생각할 뿐이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풀숲에 고개를 처박고 아주아주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는 호두에게 기다리다 못해 외쳤다.
"호두야, 그만하고 제발 좀 가자!"
이게 무슨 산책이니, 중얼거리는 나를 호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꼭 이렇게 말하는 듯이 말이다.
"이 보호자가 대체 뭐라는 거야. 원래 산책은 걸으러 나오는 게 아니라 냄새 맡으러 나오는 건데! 풀숲에 코 박고, 땅을 파며 탐험하는 일이 얼마나 재밌는 지도 모르나 봐. 왜 맨날 가자고만 그래?"